241214~1223 우리의 여름에게

 

2024.12.14. SATURDAY

다시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이상했어요. 저는 불꽃처럼 달리고 있는데, 온 힘을 다해 힘껏 달리고 있는데 모든 것이 너무 느리게만 느껴지고 온몸이 무겁고 호흡이 가쁘고 세상은 수채화처럼 흐릿하기만 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꿈인가 싶을 만큼 온 세상의 공기는 가짜처럼 무거웠어요. 그 여름 새벽의 느려짐, 흐려짐, 무거움은 지금도 거짓말처럼 생생한데요.

그 여름의 물방울을 저는 잊을 수 없었어요.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오이가 있다니, 이렇게 달고 새콤한 여름의 맛이라니, 밥 한공기를 뚝딱 먹었던 기쁨마저 저를 때리는 것 같았거든요. 아삭한 무언가를 깨문 것처럼, 마음속에서 한순간 무언가가 부서진 것 같았습니다.

이토록 지독한 여름은 다 무엇일까요. 줄곧 그 여름을 나 혼자 묻어두고, 꺼내보고, 또 한겹 덮어두는 동안, 이 무서운 이야기는 저에게 그냥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 이야기에 온통 상처만 남아 있지는 않다는 거예요.

이게 다 무슨 이야기냐고요? 사랑을 한다는 이야기죠. 지금 떠오르는 사람들에게, 흰밥처럼 새하얗고 깨끗한 마음을 주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단어는 그보다 조금 더 긴 이야기를 불러옵니다. 하나의 세계를 열어주고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의 언어를 익히고, 단어의 뜻과 쓰임을 알고, 그것을 구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어쩌면 누구에게나 영영 가질 수 없는 단어 하나둘쯤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락되지 않은 세계. 그것이 무엇인지를 영영 이해하지 못하며, 모르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고, 모르기 때문에 더 붙들리고 마는 이상한 끌림으로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세계.

아버지는 여전히 울고 있었습니다. 심장이 붉게 뛰었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을 들킬까 겁이 났습니다.

그 밤에도 저는 부지런히 배우고 있었어요. 귀가 없고 눈이 없고 쉬 깨어나지 않는 깊은 잠을 자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되는 법을. 투명의 세계를. 아홉살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적어 내려가는 오늘 밤은 하필 봄이 가깝고, 나의 고백은 두렵고, 나는 나의 문장을 미워하고, 나를 이해합니다.

누구나 오직 자신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몸으로, 나의 언어로, 나의 세계로, 나의 무게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그럴 때면 ‘없음’의 자리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없음에서 주워 올린 마음. 오직 부재를 통해서만 획들할 수 있었던 마음. 없어서 구할 수 있었던 마음. 이런 건 무어라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까요.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이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으니까요.

 

 

2024.12.15. SUNDAY

과거는 없고 오직 지금만 있는 곳. 부는 바람은 가볍고 내리는 비는 미지근하다. 잠시, 모든 것이 괜찮다. 한번쯤 잠시, 그런 곳을 떠올려본다. 안전한 곳에 마음을 두기.

내가 아닌 누군가만이 알려줄 수 있는 나의 것.

나는 나라는 이야기의 결말을 자주 상상한다. 내게 영원히 낯선 사람인 나의 어린이를 위해서라도 이 이야기의 결말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당위를 품고. 그러니까 나는 하나의 사랑 이야기가 될 것이다. 잘 되어가지 않을 때에도 나는 나의 사랑 이야기를 믿는다. 이제는 아니까. 물동이에 다 담기지 않아도 하늘은 틀림없이 거기 있다는 것을. 물동이에 가둘 수 없는 깊은 하늘을 이제는 믿으니까. 내 사랑은 여기서부터 되어간다. 순전히 나의 사랑만으로.

하지만 가능하다면 나는 나의 말에 평화의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내 말을 듣고 있는 이가 누구든 그의 귀와 마음에 평화를 안기고 싶다. 앞뒤를 알 수 없이 무심코 내게 던져졌던 성난 말과 화해하기 위해 나는 아주 오랫동안 상처가 되었던 말을 몇번이고 마음속에서 들어야만 했으니까.

바꿔 적은 문장 뒤에 할머니가 좋아하던 비단박하 한알을 그려 넣었다. 어쩐지 할머니의 믿음은 박하사탕처럼 하얗고 까슬거리고 달고 시원한 맛이 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아주 멀리서,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향해 달려오는 사랑이 느껴진다. 나의 몸, 나의 말, 때때로 나의 밤이 되어 내내 나와 함께할 사랑의 재료들. 이 생각의 끝에는 내게 나쁜 것을 던지고 유유히 사라진 사람들마저 연민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슬픔 없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슬픈 것은 슬픈 대로 그대로, 조금 더 두기로 했다. 꿈의 빛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한 새벽에 깨어나 내 안에만 내리쬐는 빛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내가 꿈이 된 것 같고 내가 빛이 된 것 같고 내 몸이 몽땅 그리움으로 채워진 것 같았다. 문득 내가 기다리던 것이 지금 이 순간이라는 걸 알아챘다. 다른 마음 없이 오직 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채운 순간. 슬픔을 슬픔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지나가면,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는 무언가가 오는지도 모르겠다. 그 무언가 때문에라도 슬픔은 슬픔으로 두고 싶다. 

 

2024.12.16. MONDAY

아무 이유 없이, 정말 아무 미움도 원망도 없이 궁금해졌다. 그때 망가진 건, 어린 내 마음 한구석이었으니까.

서러운 마음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죽음은 예외 없이 완전한 타인의 돌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흙이 되고, 구름이 되고, 바다가 되어 완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안녕, 내가 아는 나의 어린이. 이 어린이를 어떻게든 미워할 수가 없다.

아늑과 다감 속에 머무를 수 있도록.

언젠가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겨울의 쌍둥이 자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게 수신되는 편지에 대하여. 구운 설탕 냄새가 나는 가을 계수나무, 흰 구름과 직박구리, 쑥부쟁이와 개망초, 낙엽을 풀썩이며 내달리는 강아지, 막 잠에 들려 하는 길고양이의 나른한 표정마저 내게 도착하는 답장이 된다는 것을.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 어떤 시차도 기다림도 없이 손바닥을 펼치면 바로 도착하는 편지에 대하여 들려주고 싶었다.

단번에, 사랑을 떠올리는 것이다.

 

 

2024.12.17. TUESDAY

어쩌면 그때였을까. 어쩌면 그 순간이었을까. 어쩌면 그 모든 눈송이가 아버지가 보낸 신호는 아니었을까. 너무 많은 눈송이. 셀 수 없는 눈송이들. 숨막히게 흐린 하늘.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죽음을 알기 전 보름 동안, 내게는 너무 많은 기쁨이 있었다.

너무 약해지면 악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왜 어떤 사람은 살고 싶지 않을까?
개가 있고 나비가 있고 하늘이 있는데.
어떻게 아빠는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들까? 내가 세상에 있는데.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냥 그랬을 뿐.

알 수 없다. 세상에는 내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나 하나만큼은 영원히 모르는 것이 있다.

한 사람의 부재는 세계를 전에 없던 방식으로 뒤흔든다. 한 사람이 스스로 사라진 구멍은 그가 존재했던 세계를 무너뜨린다.

결국 나를 지키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서로를 지킨다는 걸 상실과 재회와 사랑의 굴레 속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불이 꺼진 지 오래된 벽난로. 해골의 옛 초상화. 시원하고 달콤한 배가 익어가고 낙과하는 정원. 가면의 방. 끝없는 구멍이 뚫려 있는 지하 감옥.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높은 탑. 

내가 아니면 열릴 일이 없는 상자. 내가 아니면 찾는 사람이 없는 약병. 내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바다. 나 혼자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바닷소리. 나의 작은 바다.

오고 가는 파도처럼. 왔다면 또 가도록. 갔다면 또 오도록. 내게는 무언가를 부드럽게 만들 것이 필요했다. 뚜껑 덮인 바다는 틈이 없어 완전하고 고요하다.

지금의 나는 어린 내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달라졌다. 틈이 생겨버렸다. 구멍이 생겼고 어둠이 오갔고 바다가 출렁이고 그 위로 파도가 오고 또 갔다. 엉뚱한 구멍을 파기도 했고 어둠을, 바다를 손에 쥐려고 힘껏 애쓰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지금의 내가 됐다. 온갖 어둠과 검은 개와 졸피뎀과 시와 바다가 뒤섞인 여기가 나의 삶이다. 파도처럼 온갖 것이 오고 또 가는 곳이 나의 삶이다. 나는 이런 삶을 사랑해버린다.

 

 

2024.12.18. WEDNESDAY

그때 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길거리를 거닐 때에도 바닥이 출렁이며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혼자라는 감각이었다. 어쩜 이렇게도 혼자여야 하는 걸까. 혼자에 대해 생각했다. 해가 지고 다시 다락을 향하면서 나는 내가 혼자라는 걸 잊지 않기로 했다. 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잊고 싶지 않았다. 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혼자임을 기억하는 것이 나의 무게를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 같았다.

가까운 사람 때문에 괴로워질 때도 혼자라는 감각을 떠올리면 이내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의 마음도 더는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혼자의 영역에는 그 누구도 들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혼자 올라간 그 다락에 그 누구도 올라서지도, 손을 내밀지도 않았던 것처럼.

다만 혼자라는 감각을 느낄 때마다 혼자 있을 누군가가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 혼자만이 혼자는 아니라고, 여기 내가 있다고 조용히 손을 흔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혼자 옆에 혼자로, 각자의 무게를 잃지 않으면서 여기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선물이 선물일 수 있도록, 타자의 슬픔보다 기쁨을 상상하는 것이 내가 아는 존중과 배려였다.

실은 다 나중에야 생각해본 이유들이고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선물을 주고 싶었던 마음의 명확한 이유를 여전히 나는 모른다.

선물을 전할 때, 그의 슬픔과 고통을 함부로 예단하고 싶지 않다. 되갚아야 하는 의무를 안겨주고 싶지도 않다. 선물을 받은 그가 그것으로 무언가를 해내고 이뤄내고 또다른 의미를 찾아내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뜻밖의 선물처럼 여기면 좋겠다. 길을 걷다 우연히 옷깃 속으로 떨어지는 조그만 낙엽 같은 기쁨 정도면 좋겠다. 가끔은 특별한 까닭 없이 그런 선물을 받고 사랑을 받은 기억이, 두고두고 용기가 되고 힘이 되기 때문이다. 사소한 기쁨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것이 내가 체득한 삶의 방식이다.

바닥을 잃었던 여름밤과 다락, 정처 없이 쏘다녔던 거리를 잊고 싶지 않다. 그런 나날 속에서도 나를 위해 음식을 해 오고, 안부를 묻는 사람과 몸을 숨길 수 있는 다락이 있었다는 것이 내 삶에 주어진 알 수 없는 호혜였다.

너무 많은 비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같이 맞을 수도 없고 같이 피할 수도 없는 비를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 모르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아끼는 시 한 구절을 옮겨 적는다. 오래 품고 있던 시가 나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더 멀리 나아갈 것 같다. 시를 쓰는 삶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오간 데 없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호혜다.

그러고도 혹여 네게 힘이 남아 있다면 가만히 눈을 감고 빗속에서 너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음을 믿어라.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2024.12.19. THURSDAY

나는 슬픔의 어원이 ‘무거움’에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그 눈빛이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나의 눈동자에 비쳤던 온갖 사랑을 나는 개의 눈동자에서 다시 본다.

나는 어둠을 다시 배운다. 아주 검고 맑은 어둠만이 선명하고 투명하게 사랑을 반사한다는 것을 배운다.

나의 세계를 다시 바라보고 내 마음을 지키며, 나는 오늘도 개와 함께 우당탕퉁탕 사랑을 배운다. 진실하고 애틋하며 뜨거운 마음은 때때로 요란하고 거칠고 소란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 하루하루가 모여 내가 어떻게 아파했고 어떻게 다시 사랑할 수 있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슬픔과 상실이 흐릿해졌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또다른 사랑이, 홀로의 힘이, 나를 지켰다는 건 분명하다. 나의 회복은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감쪽같이 되돌릴 순 없지만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바라보고 찾아내던 노력들, 지독한 상처 옆에 덧대어 붙인 요란한 사랑에 나의 치유와 회복과 성장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회복이란 어수선하고 소란하며 유난스럽고 울퉁불퉁한 것이 맞다. 더 소란해져도 좋은 것이다.

그러니, 세계를 구하고 마음을 지키는 이야기는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나의 애도는 이 소란에서부터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2024.12.20. FRIDAY

때때로 어떤 뉴스는 내 마음을 체하게 한다. 

올가을에는 자꾸 한기를 느껴서 두꺼운 겨울옷을 앞당겨 꺼내 입기도 했다. 따뜻한 차에도 잠재우지 못하는 한기를 품고, 어쩔 수 없는 찬기를 내 마음에 두고 계수나무 숲을 걷는다. 달곰한 향기를 배경으로 나는 얼마나 오래 또 얼마나 멀리까지 걸어야 할까. 아직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마음.

나를 압도하는 추위가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듯이 내 안에는 여전히 따뜻한 것이 숨 쉬고 있다. 계수나무 아래를 걸으면 느낄 수 있다. 할머니의 이름을 받아쓸 수 있게 되었을 때. 계수나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계수나무를 사랑하게 되어버렸을 때. 몸 안으로 깊이 뿌리내린 따뜻한 것. 느낄 수 있다.

문만 열면 가득했던 나의 기쁨이 여전히 박동하고 있다. 깜박 잊어버릴 때도 있지만 계수나무 아래를 걸을 때면 느낄 수 있다. 나만 아는 나의 기쁨을.

어린 내가 모아놓은 기쁨을 지금 나에게 빌려준다.

오늘도 계수나무 숲을 찾았다. 나의 속도를 찾고 나의 조도를 찾아 나의 두 눈으로 정확하게 보기 위해. 필요하다면 늘리거나 쪼개어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계수나무를 모르고 계수나무를 사랑해버렸듯이. 나는 미래를 모르지만 미래를 사랑할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계수나무 아래에는 나만 아는 상실과 추위가 있고, 나는 모르는 너의 상실, 너의 추위, 너의 어둠도 같이 흐르지만. 계수나무 숲이 여기 있고, 계수나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다.

 

 

2024.12.21. SATURDAY

여기가, 나의 기쁨이야.

기억이 새로운 집을 짓는다. 열한살부터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살던 집. 그 집의 다락과 나무 계단 냄새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낮게 매달린 알전구. 주홍빛으로 밝아지던 필라멘트. 학교가 끝나면 교과서를 안고 올라갔다가 이내 낮잠에 빠지던 곳. 다락에서 읽는 교과서에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득했다. 수업 시간엔 도무지 알 수 없던 이야기를 그곳에서는 알게 될 것만 같았다. 그건 진짜 아는 것과는 달랐지만. 때로는 알고 싶은 마음이 진짜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니까.

알 수 없지만 알고 싶은 마음으로 숲에 앉아 있던 열한살의 어린이, 그게 나였다. 나는 숲을 좋아하는 나를 좋아했다.

내가 그린 숲, 내가 지은 집, 내가 빚은 여름과 겨울이 숨을 쉬기 시작한다. 시 속에서 숨을 쉬듯 시의 공간을 충분하게 느껴본다.

무엇보다 달빛, 이라고 시가 말할 때 내가 경험하지 못한 무수한 밤을 힘껏 상상해야 한다. 그건 내가 모르는 달. 그건 내가 아는 달과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를까. 알 수 없지만 알고 싶은 마음으로. 달빛, 이라고 시가 말할 때 내가 모르는 달은 이지러지고 차오른다.

모르는 것이 있음. 이 한계에서 또다른 문이 열린다.

두려움도 절망도 없이 정말 사랑할 수 있다.

―옛날 옛날에 그 방에서 말이야……

내가 말하면, 나의 사랑이 잠을 참으며 졸린 목소리로

―옛날 옛날에 내 방에서는 말이야……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이어가며.

우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집을 지어가도 좋겠지. 어서 와, 여기가 우리 집이야. 나를 환영해주는 집. 집에게도 집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가 집이 되어주고 싶다. 사랑이 새로운 집을 짓는다.

 

 

2024.12.22. SUNDAY

이거였구나. 내가 되고 싶던 근사한 어른. 몸으로, 시간으로, 사실로 보여주는 사람들. 쓸쓸해질 때면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 “용건 없는 안부예요.” 불쑥 인사를 건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거기 있어주는 것만으로, 불안을 잠재워주는 사람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 있다.

끝내 고백할 수 없는 것을 간직한 채 고백을 이어가는 목소리에는 무력이 묻어 있고, 그럼에도 이어가는 목소리는 얼마나 간절한지.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 건 절실함이었다. 언제나 나를 바로잡은 것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진심이었듯이. 

글쓰기는 나의 이야기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수신될 수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배우는 일이기도 했다.

어려서도 자라서도 고백은 연습이 필요한 일이었다. 고백해야 할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하고 고백의 순간을 적절히 선택해야 한다는 것. 고백으로 상대와 멀어지더라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는 다짐과 용기. 고백은 그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제 와 다시 그 시간을 산다면 그렇게까지 두렵지 않을 것 같지만 그건 이미 그 뜨거움을 지나왔기 때문이고. 여전히 고백의 적절한 온도를 가늠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고백은 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을 더 배려해야 하는 일이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럴 때 언니 목소리는 꼭 깨끗한 바닷바람 같다. 숨이 트이게 하고 한순간에 시야가 넓어지게 하는 푸른 목소리. 아무것도 아니라니. 이상한 말이었다. 그건 나의 걱정과 두려움이 보잘것없고 무의미해서가 아니라, 나의 걱정과 두려움은 나를 조금도 무너뜨릴 수 없고 나를 해칠 수 없다는 믿음의 말이었다. 폭 패 있던 마음에 깨끗한 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한두마디로 타인의 오랜 불안을 달래주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겨울 간식만큼 달콤한 말을 꺼내놓기에 좋은 겨울밤. 어쩐지 이 겨울을 보내고 나면, 나는 겨울을 조금 다르게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2024.12.23. MONDAY

그러고 보니 식물마다 빗방울을 머금은 모양이 제각각이에요. 비비추는 넓은 이파리 면면 모두 젖어 비를 흘리고, 금천나무는 잎의 가장자리마다 물방울을 장식처럼 달고 있습니다. 같은 비를 맞아도 저마다 다르게 젖는 것이겠죠.

사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순간들이었어요. 특별히 자랑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지만 나의 중심이 되어주었던 순간들. 이런 순간은 접착력을 가지고 있어요. 온전하고 안전하게 이 세계에 나를 붙들어 맵니다. 친밀하고 다정한 마음, 유대를 배우는 건 이 짧은 순간들 속에서예요.

또다른 여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