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너는 아무것도 몰라.”

 

대칭점에 선 나인 리히트가 되뇌었다. 

처음과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얼굴로.

 

“아니, 나는 알고 있어.”

 

제3의 벽을 중심에 두고 반으로 접으면 꼭 겹칠 자리에서, 하지만 좌우로 갈라 찢을 수는 있어도 반듯하게 접을 수는 없는 이따위 세계라 가장 멀어지고 만 거리에서 스완 하슬러는 날카롭게 벼른 말로 대답했다. “너와 나의 차이는 앎과 모름이 아니라.” 깃발이 몸을 흔드는 방향을 따라 바람과 그림자가 걸려든다. 덕분에 가로로 길게 그인 흉터 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스완 하슬러는 ‘알’ 수 있다. 한때의 우정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눈앞의 적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곧 당도할 승리가 누구의 것이어야 마땅한지. 

 

“믿음과 불신에서 갈라졌거든.”

 

정정한다. 그래도 스완 하슬러는 ‘믿을’ 수 있다고. 그리고 믿음은 고작 겨자 씨 한 알로도 확신과 착각, 추측과 증명을 전부 같은 의미로 바꾸어 놓는다고. 군모 아래 눈동자가 청록에서 신록으로 선뜩하게 돌변했다. 감히 산을 옮기려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색이다.

 

탄창을 채운다.

그림자를 거머쥔다. 

가늠쇠에 눈을 댄다. 

낫의 머리를 겨눈다.

마지막으로, 동시에 중얼거린다. “이제 다 상관없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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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름이 운명을 묶는 첫 매듭이라면, 불완전수를 이름으로 받은 저 자식은 타고나길 백팔 겹 페이스트리에 아홉 번째 층을 도맡을 팔자였을 거다. 아홉. 그건 시작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주제에 고작 한 칸 옆의 완성에는 다다르지 못하는 애매한 숫자니까.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에는 딱 떨어지지 않고, 모두에게 나누어 주기에는 딱 물고기 두 마리가 부족하니까.

이름과 어울리지 않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주제에, 아니, 존재 자체로 이름-운명 가설을 전면 부정하고 있으면서 스완은 일방적으로 빈정거리곤 했다. 아직 여름 장미가 화사하던 열넷, 스완은 그때부터 나인의 순종이 고까웠다. 통째로 싫어할 수 있다면 편했을 텐데 차마 그러지 못해서 애꿎은 이름만 질겅질겅 씹어대며 나인, 가뜩이나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그 이름을, 그 발음을 다 뭉개서 세상 어디에도 남겨두지 않을 작정으로 저작거렸다. 그다음 무명의 빈칸에 새 이름을 적어 넣고 싶었다. 딱히 생각해둔 이름은 없었다. 그냥…….

 

“역시 아홉 번째는 애매하잖아.”

 

스완이 등에 등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무게가 실린 연필이 여백으로 새까맣게 엇나간다. 밀어내거나 짜증을 내는 대신, 나인은 연필을 내려놓고 지우개를 찾았다. 으레 익숙했다.

 

“또 시작이다.”

“야, 이번 승급 시험, 정원 몇 명인 줄 아냐?”

“여덟 명.”

“거 봐, 아홉 번째면 탈락이라니까.”

“네, 네.”

“그래서 너는 두 번째야.”

 

이 대목에서는 나인도 끼어들었다. “내가 왜 두 번째야.” 왠지 모르겠는데, 아홉 번째보다 두 번째가 더 기분 나빴다. 등 뒤에서 도사리처럼 설익은 웃음소리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참 성격 이상해. (생각만 했다.)

 

“그야 1등은 내 거거든.”

“뻔뻔하긴.” 전염된 웃음은 으깨진 열매마냥 시작과 끝이 모호했다.

“내 옆이면 두 번째 밖에 더 있냐.” 이탈한 선을 전부 지운 다음, 나인은 빈칸에 답을 적어 넣었다. 공교롭게도 하필 2번이었다. (정답: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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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새 이름은 정하지 못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말처럼 갖다 댈 이유야 차고 넘쳤다. 당장 코앞에 닥친 승급 시험이 급해서, 숫자 9와 네메시스가 같은 알파벳으로 시작해서, 어떤 길짐승의 이름도 날짐승의 이름도 어울리지 않아서, 의미를 고르면 발음이 어긋나고 발음을 정하면 의미가 어중간해서, 그 해 여름이 지독하게 더워서, 교실을 박차고 강가까지 달려가느라 숨이 벅차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든 일과 계절을 놓친 사춘기가 은근히 지독해서, 서로를 이름보다는 야, 너, 걔, 이 자식, 그렇게 부르는 게 익숙해서.

여태 그 모든 것이 이유인 줄 알았는데, 한낱 핑계에 불과하더라도 하다못해 그럴싸하긴 한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전부 아니었다. 그건 그냥. 또다시 그냥.

 

“배신자.”

우리가 앞으로도 쭉 함께일 줄 알아서. 

그렇게 믿어서…….

 

‘예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의 입매에 삶을 끊어놓은 것처럼 질긴 흉터가, ‘다른 수로 죽일 수 없는 숫자’의 콧잔등에 기질을 죽여놓은 것처럼 깊은 흉터가 생긴 밤이었다. 하나는 질기고 하나는 깊으니 그는 들여다보거나 더듬거리지 않고도 미래의 속내를 간파했다. 새 이름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알던 이름마저 버려야 할 것이다. 다시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소년은 영영 열일곱에 머물 수밖에 없고,

어떤 믿음은 정녕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다.

 

 

도망치기 어려운 겨울이 왔으니

죽어 마땅한 배신자에게

마지막 편지를 써야겠지.

 

곧 너를 죽이러 가겠노라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어디로 갔느냐고.

오래도록 빼앗긴 시대와 영광, 우리 몫의 정당한 권리를 전리품으로 취하겠노라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왜 서로를 잃어버리고 말았느냐고.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담뱃재가 편지지 귀퉁이로 떨어진다. 그을음은 불씨를 꺼트린 그림자를 닮았다. 그는 그 색이 새삼스럽게 싫어졌다. 나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