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각본

 

극본으로 읽으니 느낌이 색다르다. 영상으로 볼 때는 몰랐던 것들을 인식할 수 있어서 좋다.

비금봉과 호미산에서 발생하는 장면들의 대조와 연결들이 좋다. 해준의 눈동자와 도수의 눈동자로 장면이 연결되는 구조도 좋고, 해준과 서래 모두 산을 무서워 하는 것도, 죽음을 예감하지 못한 채 떨어진 도수와 죽음을 결심했는데도 떨어지지 않은 해준이라거나.

공자의 말에 따르면 산은 인자한 사람이 좋아하는 곳이고 바다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좋아하는 곳이라는데, 정작 작중에서는 정반대의 장소로 쓰이는 게 좋다. 산에서 누구보다 비정한 결심을 떨어뜨리고, 바다에는 누구보다 어리석은 결심을 던져버리고... 1부와 2부의 제목이 군더더기 없이 산과 바다여야 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고 느낀다.

81. 구소산(낮)에서 나오는 나레이션 ‘주름이 천 개 접힌 흰 몸은 앞뒤를 분간하기 힘드나 사람들은 긴 대롱을 내미는 주둥이를 보고 어느 쪽으로 달아날지 정한다.’ ‘더러운 세상은 멀리 떨어져 있다, 이렇게 죽어도 좋다.’는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킨다. 주름이 천 개 잡힌 흰 파도,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해변, 긴 대롱 대신 대나무 지팡이. 이렇게 죽어도 좋다.

그리고 해준과 정안과 서래 사이 차이점들도 눈에 띈다. 날짜를 세는 것, 주머니 속 물건을 단숨에 찾는 것과 헤매는 것, 식사라든가.

이 주임이 사실 남자였다는 걸 밝히는 장면도 좋아한다. 이 주임은 해준을 알고 있지만, 해준은 이 주임을 전혀 본 적이 없어서. 둘 다 이름에 준이 들어가서. 어딘가 비슷하게 젠틀한 이미지도 좋고.

부부의 세계라든가, 헤어질 결심이라든가, 바람과 불륜 관련된 작품에서 종종 생각하는 건데, 그건 바로 주인공들이 기존의 배우자를 정말로 사랑했는지, 어떤 점을 사랑했는지다. 그걸 찾다 보면 배우자와 내연 상대가 꽤 닮아 있다는 점이 재밌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나왔던 대사가 생각 난다. ‘그래, 지금은 반짝반짝거리겠지. 그치만 시간이 지나면 다 똑같애. 그 여자가 지금은 아무리 반짝반짝거려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된다고. 지금 우리처럼.’ 정안과 서래 사이에느 닮은 점이 전혀 없었을까? 해준은 단일하게 서래를 좋아했던 게 맞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그 마음이 정말로 사랑이었다면 떠나는 정안에게 매주 주말은 왜 이야기했을까? 단순한 체면 때문일까? 이혼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의미에서 서래의 선택은 영리했을지도 모른다. 순탄하게 사랑했다면 시간은 흐르고 마음은 변하고 관계도 달라졌겠지만, 그렇게 이별했기 때문에 영원히 사랑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이지구가 PC방 아르바이트생을 죽였을 때 수완과 해준의 대화도 인상 깊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아서 그랬나. 왜 잘렸을까? 생각하게 된다.

수완: 질곡동 사건 이지구 있잖아요? 도망갔는데 어디 숨었을까요?
해준: 지구는 왜?
수완: 살인이요. 피씨방 알바 아가씰 죽였네요. (해준, 말문이 막힌다.)
　　  그때 지구는 사람 못 죽인댔잖아요. (아직 말문이 막혔다.) 근데 죽였네요.
해준: (눈 질끈 감고 애써 차분한 척) 그러네.

해준은 이미 이포로 떠났다. 수완은 왜 해준에게 전화를 했을까? 수완이 해준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자명하다. 그는 해준에게 소위 짭새들과 다른 경찰의 모습을 찾아냈고, 그걸 존경해서 부산까지 내려온 모양이다. 하지만 구소산 변사 사건에서 해준이 품위를 잃으며 수완은 실망을 거듭한다. 이포에도 따라 오지 않았다. 이 전화는 이지구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한 협조 요청인 동시에 해준에게 형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수완은 어쩌면 끝끝내 해준을 비난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수완도 썩 좋은 경찰, 훌륭한 경찰, 품위 있는 경찰은 아니지만…… 해준에 한해서는 놀라운 추리력(이든 관심이든)을 갖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