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05 내 이름은 태양꽃

 

2024.12.05. THURSDAY

“난 너처럼 실망 같은 건 안 해. 힘차게 자라나기만 하면 여길 벗어날 수 있거든. 저 담장을 타고 넘어서 밝은 곳으로 갈 거야.”

저렇게 가버리는 건가.

“울지 마. 그늘진 데서 이슬을 흘리면, 몸이 차가워져서 얼른 자라지 못해. 날 봐.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울지 않았잖아.”

그러나 그때쯤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얼른 자라지 못하는 건 이슬 때문이 아니란 걸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나는 담쟁이처럼 빨리 자라는 줄기도, 힘차게 땅을 짚는 갈고리도 갖고 있지 않았던 겁니다.

결국 나는 혼자 남은 겁니다.

그의 눈과 귀는 지금쯤 얼마나 먼 데까지 뻗어나갔을까요.

나도 언젠가, 꽃을 가질 수 있을까? 내 몸에도 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빨리 자라는 줄기도 갖지 못한 내가 어떻게 꽃을 가질 수 있겠어요? 나는 감히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럴 수 있을까’ 상상하고 있자면 가슴 한켠이 가만히 밝아져오곤 했을 뿐입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담장 밑이라는 것을, 종일토록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버려진 땅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을 만큼 환하게요.

먼 바다 냄새를 싣고 온 서늘한 바람이 어느샌가 다가와서 참견을 했습니다. “글쎄, 내가 보기엔 해파리 같은데? 투명하게 하늘거리는 게. 아니면, 말미잘 촉수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나도, 꿀벌도, 잠자리들도, 해파리와 말미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내 꽃은 대체 어떻게 생긴 걸까요. 웅덩이라도 곁에 있다면 비춰볼 수 있을 텐데요. 내가 있는 곳이 그늘이 아니라면, 그림자로 모양만이라도 알 수 있을 텐데요.

나는 자꾸만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녁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왜 자꾸 잊어버리는 거예요? 거기 내 꽃이 있어요. 제발 조심해주세요.”

나는 지쳐갔습니다. 나비들도 꿀벌도, 양껏 꿀을 빨아먹은 뒤에는 막 아물려 하는 내 꽃잎의 상처를 무심코 건드려 덧나게 하곤 했습니다. “아차, 미안.” “거기 네 꽃잎이 있는 걸 몰랐어.” 나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견딜 수 없었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나도, 빛깔 있는 꽃잎을 갖고 싶었습니다. 저 양달에 핀 장미처럼 붉은 꽃잎을요. 들국화처럼 보랏빛이어도 좋아요. 물망초처럼 푸른빛이어도 좋아요. 아무도 내 꽃잎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선명한 빛깔이 있다면. 아, 빛깔만 있다면. 

“모두한테 그 얘길 전해주세요. 아무도 나에게 찾아오지 않도록요.”

저녁바람은 떠났습니다. 떠나면서 다시 할퀴어버린 꽃잎이 쓰라려왔습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좋아. 모두가 떠나가도 좋아. 잘됐어, 정말로 잘된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이슬이 흘러내리는지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왜 나만 혼자서 이렇게 괴로워야 하는 거야? 하필이면 왜 나만!” 아무도 내 말에 대답해주지 않았습니다. 두툼한 먹구름장 뒤에 숨은 달과 별들도, 저편 꽃밭의 향기로운 꽃들도 모두 단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말고 누가 이 깊은 밤에 잠들지 않고 있었던 걸까요?

“저 꽃밭에선 다들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니? 진딧물이 잔뜩 달라붙어 단물을 빨아먹는 바람에, 예쁜 봉숭아들이 밤낮으로 숨죽여 앓고 있는 걸 모르니? 여린 줄기를 뚫고 날카로운 가시들을 돋워 내보낼 때마다 장미꽃들이 몰래 울음을 참는 걸 모른단 말이니?”

“너, 넌 누구야?”
“지금 네 눈에는 보이지 않아.”
“어디 있는 거야?”
“지금, 너로부터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담장 바로 밑에.”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싹을 틔워내려고 애쓰고 있어.”
“어떻게 세상으로 나와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고 있단 말이야?”

그때 나는 그 목소리가 웃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쓸쓸한 웃음소리를 나는 처음 들었습니다.

“나도 세상에 나가본 적이 있어. 몇 번 되진 않지만, 그것도 아주 짧은 동안이었지만……”

“그러다보면 때론,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따위의 일들이, 나에게는 영원히 불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햇어.”

“상상할 수 있겠니? 땅속에서 눈을 뜨면, 잠깐 동안 보았던 세상의 기억이 얼마나 눈부신지 몰라. 세상에는 바람이 있고, 바람이 실어오는 숱한 냄새들이 있고, 온갖 벌레들이 내는 소리들이 있고, 별과 달이 있고, 검고 깊은 밤하늘이 있잖아. 그것들이 견딜 수 없게 보고 싶어지곤 해. 영원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져.”

저 얼굴 모를 풀은 처음부터 다 듣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투덜대고 고함치며 모든 것을 미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혼자서, 온 힘을 다해 흙을 뚫고 돋아나려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제 다시 가냘픈 흙구멍을 내기까지, 그 풀은 얼마나 오랜 시간을 혼자서 싸워야 하는 걸까요.

날이 저물 때까지 나는 그늘 바깥의 태양을 향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습니다. 햇빛이 그리웠습니다. 환하고 따스한 저 손길을 한 번만, 단 한 번만 내 얼굴에 느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어김없이 아침이면 먹구름장은 물러갔고, 멀리 양달의 꽃밭에는 거짓말처럼 환한 햇빛이 드리워졌습니다.

담쟁이가 담을 넘어간 뒤 느꼈던 허전한 마음과는 비길 수 없는 외로움이 찾아왔습니다. 뿌리의 상처 때문에 몸을 뒤척일 때면 이따금 막막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고, 덜어내줄 수도 없는 이 괴로움을 언제까지 견디고 있어야 하는지요.

나는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그늘 밖의 저 따스한 햇빛을 느낄 수 있다면.

그날 밤 얼굴 모를 풀은 나에게 물었지요. 잠깐 동안 그가 보곤 하는 세상의 모습이, 냄새와 온갖 소리들이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했지요. 다시 검고 깊은 밤하늘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다고 했지요.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담장 모서리의 거미줄에 영롱한 빗물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쓰르르쓰르르. 담장 너머에서 쓰르라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밤이 찾아올 때까지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보았습니다. 검은 하늘은 얼마나 깊었는지요. 달빛은 얼마나 부드러웠는지요. 밤 공기는 얼마나 촉촉하게 젖어 있었는지요.

아침마다 나는 눈을 뜨고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귀 기울여 듣고, 모든 냄새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셨습니다. 처음으로 나는 참새들의 왁자지껄한 노랫소리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상냥하게 꽃들과 어린 풀들과 나무들의 안부를 물으며 불어가는 아침바람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내 꽃잎을 조금 아프게 했지만요. 줄을 이어 식량을 나르는 부지런한 실개미들을, 산바람이 실어오는 아련한 청솔 냄새를, 여린 새털처럼 일렁이는 흰구름떼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냄새 맡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이들에게 짧게나마 인사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나는 그들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그 풀 역시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잊지 않게 해주세요.
그 풀이 나에게 처음 말을 걸어왔던 밤을 잊지 않게 해주세요.
세상 모든 것들을 이렇게 생생한 눈으로 사랑하는 법을, 살아 있는 동안 잊지 않게 해주세요.

내 몸 어느 구석에선가 탁, 소리와 함께 성냥불 하나가 당겨진 것 같았습니다.

한데 웬일일까요. 나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정신이 번쩍 나며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빛깔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히 해왔지만, 그것이 정작 무슨 색깔일지는 미처 상상해보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내 꽃에 빛깔이 생겼다면, 그게 무슨 색일까. 오랫동안 캄캄하고 괴로웠던 내 마음을 기억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숱하게 소리쳤던 원망의 말들을 생각했습니다. 잎사귀가 흠뻑 젖도록 흘린 차가운 이슬들을 생각했습니다. 아아, 어쩌자고 나는 그렇게 캄캄한 마음을 갖고 지냈던 걸까.

“만일 내가 너한테 이름을 붙인다면, 태양꽃이라고 부르겠어, 이 바보 친구야. 태양처럼 샛노랗고, 태양보다 눈부신 꽃아.”

나는 보았습니다. 찬란한 내 꽃잎들이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며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을. 미처 상상해보지 못한 아픔과 함께 꽃받침이 떨어져나가고 황금빛 꽃가루가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바람이 안고 날아가는 내 샛노란 꽃잎들을 나는 꼿꼿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습니다. 언젠가 그를 만나게 될 순간을 위해 오랫동안 연습해왔던 따뜻한 웃음이었습니다.

왜 슬퍼하지 않냐고요?
이제는 알고 있는걸요. 나에게 꽃이 피기 전에도,
그 꽃이 피어난 뒤에도, 마침내 영원히 꽃을 잃은 뒤라 해도,
내 이름은 언제나 태양꽃이란 걸요.

그런 것들이 있다. 아무리 절망하려야 절망할 수 없는 것들. 오히려 내 절망을 고요히 멈추게 하며, 생생히 찰랑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열어 보여주는 것들.

다섯 개의 커다란, 섬세한 주황빛이 도는, 말랑말랑한, 흰 솜털이 돋은 복숭아들. 그 둥근 윤곽선, 가운데를 따라 얄따랗게 파인 홈, 날큼하게 솟은 꼭지까지, 어쩐지 성스러운 느낌이 들게 어여쁘다. 완전한 아름다움이다. 차마 칼을 댈 수 없다. 몇 번 망설이다가 하나를 골라, 공들여 씻은 뒤 껍질을 벗긴다. 흘러내리는 향긋한 즙을 혀끝으로 핥아본다. 한 조각을 잘라 입에 넣어본다. 아, 눈부신 맛이구나. 황홀하게 달콤하구나.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할 만큼.

그래서, 나는 이제 사랑할 수 있다.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모든 폭력과 고통의 세계 속에서도, 가을 아침의 햇빛을. 한 조각의 달콤한 복숭아를. 웃고 있는 아기의 깨끗한 두 눈을. 깨끗한 눈물을.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동시에 모든 것을 우리 앞에 펼쳐주는 시간을…… 우는 새와 피는 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