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24 눈물상자

 

2024.11.24. SUNDAY

옛날, 아주 오랜 옛날은 아닌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아이가 살고 있었다. 아이의 눈동자는 칠흑같이 검었고, 물에 적신 둥근 돌처럼 언제나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아이에게는 이름이 따로 있었지만, 모두 그 아이를 ‘눈물단지’라고 불렀다.

눈을 찡그리게 하는 햇빛, 연푸른 잎사귀들을 아기 손바닥처럼 팔락이는 봄나무들 틈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기만 한 아저씨의 뒷모습은 잘못 번진 먹 자국처럼 어색해 보였다.

“이 새의 첫번째 주인은 녀석을 ‘파란 새벽의 새’라고 불렀다더구나.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내릴 때만 노래를 했기 때문이란다.” 아이는 문득 자기가 하루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바로 그 파란 시간이라는 걸 깨닫고는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럼, 이 커다랗고 아름다운 푸른빛 눈물은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야.”
“그 옆에 있는 붉은 눈물은요?”
“아주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뒤에, 아주 오래 울고 난 뒤에, 그 눈물까지 마르고도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처음으로 다시 흘리는 눈물이란다. 그러니까, 퍽 구하기 어려운 눈물이지.”

“내가 찾고 있는 건 순수한 눈물이야.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면서 흘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지만,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이유들로 인해 흘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물이란다.”

자신의 눈물이 어떤 빛깔로 응고되는지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하늘에 검푸른 잉크빛이 번지고, 설탕 같은 별들이 무더기로 떠오를 때까지 아이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못했다.

투명한 물처럼 쏟아지는 달빛 아래 새는 은청색 깃털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가 없으니 모두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눈물 자국이 뺨에서 마르지 않는 아이가 없으니. 갈게요. 아이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계속 웃어요. 나는 이제 갈게요.

달빛이 만든 두 그림자가 젖은 풀숲 위로 앞장서 갔다.

아이는 눈에 가득 차는 밤별들을 보았고, 이날따라 그 빛들이 적막하다고 느꼈다. 

“세상의 모든 눈물이 태어나기 전의 눈물. 세상의 모든 눈물이 죽은 뒤의 눈물. 세상의 모든 눈물들 사이에 고인 눈물. 그 눈물에 닿는 것만으로, 아무리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마음도 천천히 녹기 시작한단다.”

달은 잠시 구름에 가렸고, 별들은 거대한 무리를 이룬 채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 선 채로 아이는 다시 눈물이 고이는 걸 느꼈는데, 그건 단순히 두고 온 가족이나 집에 대한 생각이 아닌, 어떤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에서 연유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 무거웠던 가슴에선 박하사탕을 머금은 것처럼 싸한 청량감이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생생한지, 얼마나 눈물겹게 아름다운지는 늘 느꼈던 것이지만, 그 리듬과 빛의 즐거움을 모르고 지내왔다는 걸 아이는 놀라며 깨닫고 있었다.

“……하늘이 눈물을 흘리시는구나.”

파란 새벽의 새는 마치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싶은 듯 가까이 날아와 뺨을, 눈두덩을 푸른 꼬리털로, 보드라운 가슴털로 쓸고 가곤 했다. 수없이 흐르던 눈물의 흔적을 더듬고 싶다는 듯이. 그 물에 깃털을 적시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듯이.

눈이 깊었는데, 눈물상자 아저씨보다 눈빛이 더 어둡고 슬퍼 보였다.

“정말 그럴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보다 영혼이 뜨겁고, 나보다 생생하게 심장이 살아 있는 걸까. 하지만 그건, 내가 직접 울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일 거야. 눈물이라는 게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지,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는 말이다. 나는 늙었고, 살아갈 날이 많이 남지 않았어. 이제는…… 알고 싶구나.”

할아버지는 아이의 머리칼을 귀 뒤로 다정히 쓸어넘겨주었다. 정말이지, 할아버지는 조금 전까지의 외롭고 슬픈, 결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것 같던 노인과는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정말 이상하구나. 이런 기분은 평생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슬픈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기쁜 일들과 감사할 일들이 있었는지, 고통스러운 시간과 평화로운 시간들이 함께 했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깊이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건…… 영혼을 물로 씻어낸 기분이구나. 그 모든 걸 겪어낸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지 이제 알겠어.”

“고맙소. 당신이 말한 대로 눈물을 모조리 써버렸으니, 이제 더는 눈물을 흘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소. 하지만 오늘의 기억만으로도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소.”

“그림자도 눈물을 흘린단다. 눈물의 입자가 너무 고와서 곧 공기 중으로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모를 뿐이지. 이 눈물은 이렇게 꼭꼭 여며 싸서 가지고 다녀야 한단다. 햇빛 아래에서 펼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아. ……어떤 사람은 눈으로 흘리는 눈물보다 그림자가 흘리는 눈물이 더 많단다.”

아이도, 아저씨도 숨을 죽였다. 할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깊은 물속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눈물 때문에 모든 것이 흔들려 보였다. 모든 것이 뜨겁고, 모든 것이 아프고, 그 뜨거움과 아픔 속에서 모든 것이 생생했다. 아주 작은 눈물 한 방울이 구슬처럼 뺨으로 굴러떨어졌다. 벽에 비친 두 개의 그림자눈물샘에서는 그보다 커다란 눈물방울들이 쉴 새 없이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희붐한 새벽 창을 향해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애잔한 곡조의 아름다운 노래였다. 아이의 눈이 가만히 젖었다. 이번에는 뜨겁지도 아프지도 않아서,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아이는 피리 소리에 온 귀를 기울였다. 

햇빛이 물처럼 맑은 아침이었다.

궁금했던 아이의 눈물 빛깔은 노랑도, 초록도, 분홍도, 파랑도 아니었다. 그 어떤 빛깔이라고도 할 수 없는 투명하고 미묘한 빛들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이 수많은 빛을 보렴.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눈물은 흔치 않단다.”

“순수한 눈물이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눈물을 말하는 게 아니야. 모든 뜨거움과 서늘함, 가장 눈부신 밝음과 가장 어두운 그늘까지 담길 때, 거기 진짜 빛이 어리는 거야.”

“눈물에 어린 빛깔들이 더욱 복잡해질 때, 한순간 네 눈물은 순수한 눈물이 될 거야. 여러 색깔의 물감을 섞으면 검은색 물감이 되지만, 여러 색깔의 빛을 섞으면 투명한 빛이 되는 것처럼.”

“하지만 괜찮아. 언젠가 내 눈물샘도 그림자눈물샘처럼 녹아 흐를 거라고, 나와 그림자가 함께 울 수 있을 때가 올 거라고 믿어. 이 세상 어디선가 순수한 눈물을 찾게 된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모두 적셔준다는 그 눈물이 어쩌면 나를 도와줄지도 모르지.”

울음을 참고 있는 아이의 그림자와 함께.

아이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눈물을 참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오는구나. 숨겨진 눈물은 그 가슴 가운데에서 점점 진해지고, 단단해지는구나.

아이는 힘차게 들판을 달리고, 언덕과 산을 한달음에 넘어갔다. 집으로, 엄마가 연둣빛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달렸다.

때때로, 예기치 않은 순간에 우리를 구하러 오는 눈물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