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11~1123 사랑 후에 오는 것들 下

 

2024.11.11. MONDAY

한강 수면이 예리하게 반사된 순간, 나는 거기에서 수천 년의 역사를 살아온 용 한 마리를 보았다. 

그날 마음의 벽에 후회라는 상처를 새겼다. 그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바라보며 칠 년을 보냈다.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기내에서 밀려오는 후회로 마음과 영혼이 함께 흔들린다.

지금이란 시간은 홍이와 헤어진 순간에 멈춘 채 오늘까지 연연히 이어진 시간의 쇠사슬이 만들어 낸 매듭이다. 이 짧은 여행 중에 그 매듭을 풀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지 않는다. 평생이 걸려도 풀 수 없는 올가미 속에 나와 홍이가 있다. 그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서울을 찾아, 같은 하늘 아래에서 그녀와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비행기를 탔다.

“거짓말, 그 사람 잊지 못했으면서.” 칸나의 목소리는 진실을 꿰뚫는다. 도대체 누가 후회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까. 신은 사람에게 후회하게 함으로써 무엇을 배우게 하려는 것일까. 무겁게 짓눌리는 시간의 쇠사슬을 등에 지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기내에 겨울 햇살이 스며든다. 비행기의 선회에 따라 빛줄기가 칠 년이라는 세월을 되돌아보듯 기내를 가로지른다. 빛의 자락을 찾아 창밖을 내다본다. 태양과 시선이 부딪친다. 부딪친 햇살에 눈이 부셔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만다. 감은 눈 뒤편에 그저 아무 말 없이 달리는 하얀 옷의 그녀, 최홍이 있다.

“난 그 사람이 미워. 아직도 네 마음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 사람이.”

그래 모든 게 이미 늦은 옛날이야기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는 걸 믿어?”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 어려운걸. 하지만 분명 어딘가엔 있을 거야.”

홍이는 이노카시라 공원 호수면을 바라보며, 어딘가에? 그게 어딜까?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어딘가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수면에는 빗방울이 만드는 무수한 원들이 그려졌다 금세 사라져 갔다.

눈부신 공간 끝에서 시선이 매듭을 만든다. 갑자기 소리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기억이 단번에 칠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모세가 바다를 둘로 나눈 것처럼 시야를 가르는 길이 생기더니, 그 끝에 홍이가 있었다. 우리는 시간의 쇠사슬을 움켜쥔 채 서로 아무 말 없이 그저 멍하니 한강의 용이 가져다준 기적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이제껏 기적이라든지 우연이라든지 하는 말을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나면 놀라움에 앞서 사고가 정지되고 만다.

칠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기적적인 재회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일까.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 것일까? 아니면 결정적인 마지막을 가져올 전조일까?

그날 나는 슬픔으로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커다란 실연의 아픔을 짊어지고 고개를 떨군 날들을 지내고 있었다.

“아, 일본 사람이 아니군요.”
“일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나요?”

내가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젓자 홍이의 얼굴이 봄처럼 일제히 꽃을 피웠다. 첫눈에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라고 느꼈다. 실연으로 쓰라리던 마음이 순간 위로가 되었다.

“스쳐 지나갈 건지 머무를 건지 빨리 결정해야 해요. 이거 지금 생각한 건데 어쩌면 사는 쪽으로 결정할지도 모르겠어요.”

시선을 비키며 걷기 시작한 홍이는 과거를 완전히 잘라 내버린 사람 같다. 그날의 눈동자에 어렸던 빛은 거기에 없다. 그녀는 이미 다른 세상에서 다른 누군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기적적인 재회에 흥분하고 있는 나를 타일러야 한다. 마음의 지평에는 웅장한 한강과 같은 칠 년이라는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최홍의 현재를 방해할 권리가 내겐 없다.

나는 백합 꽃다발을 안은 채 발을 뗄 수가 없어 그저 옛 연인인 홍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베니, 나는 말을 잘 못하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거야.”

지금 빛은 내 곁에서 생동한다.

어깨를 부딪칠 때마다 추억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때마다 조바심을 맥주와 함께 위로 흘려보내야 했다.

홍이가 외국인이어서 둘 사이에 경계할 것이 없었으므로 서로의 현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설마 그 후 얼마 안 있어 우리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리라고는 그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차가운 공기가 차안으로 차례차례 얼어붙어 간다.

 

 

2024.11.12. TUESDAY

처음 왔는데도 무척이나 그리운 풍경이다. 반투명한 파란색 필터를 통해 바라보는 한 편의 시 같은 경치. 경험한 적이 없는데 기억에 있는 풍경. 남산이 바로 눈앞에 서 있다. 노스탤지어라는 말이 딱 맞는 그리운 풍경의 파노라마. 기억을 흔들어 놓는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는 걸 믿어요? 하고 홍이가 중얼거렸다. 호수면에 부딪히는 비를 바라보며 어려운 질문인걸, 하고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거야. 홍이는 비안개 끝으로 시선을 향한 채 그게 어딘데요, 하고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녀가 갈구하는 사랑의 크기를 알기가 두려웠고, 그럴 만한 여유가 그때의 내게는 없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비로부터 그녀를 지켰다.

난 외국 사람하고 결혼 안 해요, 하고 홍이가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나는 우산을 들고 있던 손을 바꾸고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이상해요. 나 그쪽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덜컥했어요. 왠지 그쪽을 잘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오래된 빙하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단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남산은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 같다. 내 오랜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다. 홍이는 내 얼굴을 흘끗 보더니 더 엉뚱한 말을 덧붙였다.

“나한테 결혼하자고 하지 말아요.”

저편으로 해가 저문다. 산 앞쪽은 어둑어둑한데 산의 윤곽은 석양을 받아 타들어 가듯 빛나기 시작한다. 하늘은 우주와 동화되기 시작하고, 푸른색에서 군청색으로 깊이를 더하고 있다. 창밖의 추위를 상상하며 나는 수화기에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사랑할 수 없게 된 것뿐이야, 하고 칸나가 남긴 말을 몇 번이고 헤아려 보았지만, 도저히 그녀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남을 믿지 못하게 됨으로써 자신을 망가뜨려 갔다. 첫사랑이었기에 마음의 크기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몰랐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칸나가 떠났다는 것보다 그 자리에 있던 것, 말하자면 난생처음 알게 된 사랑의 기쁨이 느닷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오히려 당황하고 허둥댔던 것이다.

내가 믿고 있던 세계가 무너져 버린 슬픔은 어느새 미움으로 변했고, 그 끝없는 원망 탓에 나는 웃음을 잃고 말았다.

홍이는 미워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한꺼번에가 아니라 조금씩, 설교를 하거나 깨우쳐 주려 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고 강요하지 않는 부드러움으로 엉킨 내 마음을 풀어 서서히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내 마음속에 있던 것이 몽땅 새것으로 바뀐 것 같아 놀라웠다. 이상하게도 거기에, 그러니까 방 한구석에 최홍이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홍이는 단지 내 방을 청소하고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나의 어리석음을 나 대신 쓰레기통에 버려 준 것이다. 음울하던 내 마음에 푸른 하늘을 가져다주었고 우물쭈물하는 내 상황에 넓고 파란 바다를 불러왔다. 그녀가 내 어두운 삶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 주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빨리 다시 일어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홍이는 억지도 강요도 하지 않았고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나를 구원해 준 것이다. 얼마나 알기 쉽고 사랑스러운 교훈인지. 깨끗해진 방 안에서 혼자 침울해하고 있는 건 너무나 바보스러운 일이었다.

빛의 정령들이 아득한 은하로 돌아가고 있다. 조용히 세상의 빛과 색채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남산은 이미 어두워졌고 능선이 어슴푸레하게 윤곽을 두르고 있을 뿐, 세상 모든 것이 군청색 어둠에 빨려 들어가려고 한다.

한국어로 보내는 쪽은 안녕히 가세요, 가는 쪽은 안녕히 계세요, 하고 인사한다. 프랑스의 오르봐, 영어의 굿바이, 일본어의 사요나라와는 조금 다르다. 남아 있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이 각각 다른 작별 인사를 하는 건 이 넓은 세상에서 한국어 뿐이 아닐까. 홍이의 설명을 듣고 상대편을 배려하는 그 말의 다정함에 나는 감동했었다.

“단 우리의 마지막은 소설에 쓴 것처럼 해피 엔딩은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나는 피아노를 미워했고 어린 시절 일부러 손가락을 부러뜨렸다. 어머니가 나를 걱정하는지, 아니면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된 것을 슬퍼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피아노 뚜껑을 여린 손가락 위로 덮어 버렸던 것이다.

추억이 넘쳐흘러 말로 토해 낼 수가 없다. 한마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그러나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던 탓에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자라고 말았다.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 안타깝고, 내 마음을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분한 마음에 어금니를 깨물고 만다. 후회에 등을 떠밀리듯 칠 년 동안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하지만 커다란 한숨에 실려 나온 말은 가냘프다. 말을 직업으로 하고 있으면서 말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으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어느 날 홍이는 우리 관계가 어떤 거냐고 에둘러 물었다. 우리는 아직 사랑을 속삭이는 관계는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나는 진실한 사랑을 찾아 헤맸다. 그래서 한번 칸나에게 속삭인 사랑의 말들을 홍이에게 다시 쓰고 싶지 않았다. 칸나의 요구로 입술에 담았던 모든 단순하고 천진하며 죄 많은 말들과 겉으로만 한 약속들을 순진한 홍이에게는 결코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이미 더럽혀진 것처럼 여겨졌다. 다른 말로 혹은 다른 태도로 나는 홍이를 마주하고 싶었다.

우리는 아침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창을 열고 숲 위에서 흔들리는 달을 바라보았다. 홍이가 기뻐하는 것이 나도 기뻤다. 나는 홍이를 뒤에서 끌어안았고 그녀는 내 가슴 안에서 얌전히 아침을 기다렸다.

숨조차 얼어붙을 것 같은 서울의 밤이다. 홍이가 운전하는 파란색 줄리엣이 조용히 밤의 서울로 미끄러져 나왔다.

차 안의 답답할 정도로 정체된 시간이 사고와 행동까지 둔하게 만든다. 손을 뻫으면 닿을 곳에 홍이가 있는데, 예전처럼 팔짱을 낄 수도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당연히 사랑을 속삭일 수도 없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모습과는 달리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서울의 밤은 화려한 불빛으로 눈부시고, 차가 속도를 낼 때면 깃털처럼 가벼운 빛의 띠가 좌우로 수없이 만들어졌다가는 사라졌다. 영하 십 도의 찬 공기는 불빛을 더욱 영롱하게 만들어 서울의 어둠 속 여기저기에 빛의 꽃을 피웠다.

주변 사람들과 같은 별에서 태어났다는 행복을 잊을 때마다 나는 시인의 평이하나 무게 있는 말을 반추하게 되었다. 

차는 신라호텔을 지나 그대로 어둠 속으로 진로를 잡았다. 멀어져 가는 서울의 야경을 뒤로하고 차는 조용히 남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마치 은하계를 빠져나오려는 우주선처럼. 밀폐된 차 안에는 음악도 없이 조용한 엔진 소리만이 진동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우주 그 자체의 신음 소리, 바로 은하의 진동 소리다.

“아직도 달리니?”

일억 광년 떨어진 별에 있는 사람에게 묻듯 나는 겨우 홍이에게 말을 건넨다. 바로 대답이 올 리가 없다. 일억 광년이란 시간의 거리를 여행하는 가냘픈 빛처럼 홍이의 대답은 느리게 돌아온다. 홍이는 핸들을 꼭 쥔 채 응, 하고 대답했다. 자칫 못 알아들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지나가는 자동차는 없었다. 어둡고 고요해진 우주만이 두 사람의 앞길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분지에 무수한 광원이 서로 빛을 발하고 있다. 보석을 뿌려 놓은 것같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창백하게 타 들어가듯 빛나고 있다. 먼 별의 깜빡임처럼 아련한 대답으로 나는 여전히 홍이가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장에 꽂아 두었다. 드넓은 사막의 모래 속에 묻어 두듯.

대충 넘기던 페이지의 첫 문장이 그대로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 투명한 언어의 빗줄기. 만난 적도 없고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던 그의 말이, 그에게는 외국인인 내 마음에 그대로 배어들었다. 내 몸에 들어온 말의 작은 입자는 내 안에 있는 시간과 인생과 사고를 동시에 관통해 갔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영혼을 흔드는 듯한 너무나 큰 감동에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하고 눈을 깜빡이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잊고 창밖의 숲을 바라보았다. 이 시가 쓰인 시대 분위기와 그가 처했던 상황, 그의 죽음을 상상하며 깊이 숨을 죽였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후회하며 사는 동물이다. 사자나 기린이나 낙타가 후회를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후회를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얼마나 괴롭고 덧없는 존재인가.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자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이 시는 바람이 일어 나무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던 것들이 그대로 존재함으로써 이 세상을 움직이고, 형태를 만들고, 존재하게 한다는 걸 가르쳐 주었다. 내가 태연하게 있으면 세상도 고요히 있으려 한다고 시인은 내게 깨우쳐 주었다.

우리는 무언가에 이끌려 갔고 또 거기서 멈추었다고 할 수 있다. 별이 쏟아지는 밤, 얼어붙은 우주 공간 바로 밑에 우리를 태운 우주선은 어쩔 수 없이 정박한 것이다. 은하계에서 멀리 떨어진 캡슐 안에서 우리는 단둘이 되었다. 멀리서 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말을 잃고 그곳에 있다. 거기엔 회선이 끊어진 채 방치되어 있고, 나느 이을 방법을 찾지 못해 끊어진 회선의 단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2024.11.13. WEDNESDAY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언젠가 네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어.”

긴 침묵이 조금씩 두 사람의 마음을 침식해 들어와 깎아지른 듯이 날카로운 빙하의 단면을 부수었다.

“그런데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 같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네게 할 말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렸어.” 

그 옛날 우리가 아직 빛의 한가운데에 있었을 때, 나는 홍이를 베니라고 불렀다.

홍이는 나를 힐끗 보고는 서먹서먹한 분위기로 되돌린 다음 서둘러 은하 저편으로 얼굴을 돌렸다. 차체가 흔들리더니 길가에 세워 두었던 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말이 끊긴 채 우리를 태운 우주선은 다시 서울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한다. 핸들을 잡고 있는 최홍의 얼굴에서는 그때의 부드러운 빛을 찾을 수 없다. 달 표면처럼 창백하게 얼어붙을 것같이 빛났다.

나는 그녀 마음에 닻을 내려야 했다.

내 생각 탓인지 차의 속도를 내며 그녀가 뭔가를 뿌리치려 한다는 것이 전해 온다. 물론 그건 나라는 환영임에 틀림없다. 두 사람이 빛을 발했던 시절의, 이제는 무겁기만 한 그 눈부심과 혹은 사랑의 망령.

귀울음이 나고 기억의 실이 머리 꼭대기에서 천상으로 팽팽히 잡아당겨졌다. “베니, 넌 왜 그렇게 열심히 달리는 거니?” 어느 날 나는 나무 그늘에 서서 달리는 홍이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번져 가는 시야 저편에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다.

 

 

2024.11.14. THURSDAY

창가에 있는 일인용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다. 알코올이 식도를 태우며 위로 내려간다. 그리고 거꾸로 발바닥에서부터 서서히 피로가 올라온다. 그대로 머리를 소파에 기대고 눈을 감아 본다. 나는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신다. 다시 빛의 샤워 속을 달려가는 홍이가 보인다. 언젠가 왜 그렇게 열심히 달리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홍이는 그냥,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저 그뿐이었는데 나는 왠지 그다음을 물어보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달리는 이유를 알기가 두려웠다. 둘이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다음부터 홍이는 더 오랫동안, 그리고 더 멀리 달렸다. 달리기를 할 때의 홍이는 내 손에 닿지 않는 존재였다. 달리는 그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유가 존재하기라도 하듯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자세였다.

남산 꼭대기임을 나타내는 불빛만이 어두운 유리창 안에서 용의 눈처럼 깜빡이고 있다. 빨간 별이 호흡하고 있다. 그건 홍이다. 

이런 운명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만약에 말인데, 있을 수 없는 예기치 못한 재회에 갑자기 맞닥뜨린다면 넌 거기서 운명을 느끼겠니?” 
“나는 운명론자가 아니어서 그런 우연에 좌우되진 않아.” 

피로한 탓에 귓속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저주파 진동이 느껴진다. 우주에서 도착한 전자 신호처럼 뇌리를 흔든다. 정지된 사고의 끝에 명멸하는 빨간 별의 존재가 있었다. 

한숨에 창이 뿌예졌다.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홍이란 한자를 적어 본다. 글씨가 점점 옅어지더니 우주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2024.11.15. FRIDAY

나는 홍이 팔을 잡고 그녀를 침대의 바닷속으로 끌고 간다. 외로웠고 익사할 것만 같아 그녀에게 매달려 있고 싶었다. 두 사람은 사랑의 바닷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내가 가라앉지 않도록 꼭 끌어안았다. 우리는 입으로 전하는 호흡으로 부력에 저항하며 언제까지고 바다 밑에서 사랑했다.

“괜찮아, 베니. 난 이미 인생의 모든 것에 지각한 상태니까.” 

세월의 바다를 헤엄치면서 나는 조금씩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했다.

때로 홍이의 잔영을 찾듯 통역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거기엔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있을 뿐이다. 한순간에 나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언제나 말 없는 목격자인 남산이 빛 속에 서 있다. 빛의 입자를 걸쳐 입은 남산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투명한 겨울의 하루다. 

그날 나와 홍이는 결혼을 약속했다. 엄밀히 말하면 결혼이라는 단어를 썼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언젠가 우리가 하나가 될 거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것도 주저할 것이 없었다. 둘 사이에는 한 장의 천도, 둘 사이를 가르는 문도, 세상을 차단하는 높은 벽도, 끝없는 국경선도 없었다. 

“앞으로 쭉 이렇게 함께 눈을 뜰 수 있으면 좋겠다.” 
“평생 이렇게 눈을 뜨게 될 거야. 누구도 우리의 미래를 방해할 순 없을 테니까.” 

그 티 없이 웃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마음을 해방시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 배신과 미움과 의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정한 미소였다.

“죽을 때까지 함께 아침을 맞이하자.” 

칸나가 떠난 뒤, 나는 그동안 쌓아 올린 말이라는 꿈의 궁전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목격하고 실어증과도 같은 상태에 빠졌었다. 칸나에게 한번 썼던 말을 홍이에게는 쓰고 싶지 않았다. 홍이나 칸나를 비교하고 싶지 않았다. 홍이와의 사랑은 그렇게 진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죽을 때까지 함께 아침을 맞이하자는 말은 내게 결혼 이상의 선언과 같았다.

젊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고, 사랑보다 뛰어난 것은 없으며, 마음보다 깊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 두 사람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인생의 함정이 있고, 도대체 어디에 인생의 덫이 놓여 있으며, 도대체 누가 두 사람을 폄하하려 한단 말인가. 활짝 갠 하늘은 두 사람을 위해 펼쳐져 있었으며, 상쾌한 바람은 두 사람의 마음을 응원하기 위해 불었고, 공원의 반짝이는 나무들은 두 사람을 위한 사랑의 찬가를 불러 주었다.

행복과 같은 양만큼의 불안도 있었다. 그 불안을 뛰어넘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행복의 질에 달려 있다. 그날 내 곁의 홍이는 틀림없이 행복 안에 있었다. 행복은 평생 이어지는 것이라고 그날의 우리 두 사람은 믿으려 했다.

 

 

2024.11.16. SATURDAY

그날 우리는 아직 지구가 둥글다고 믿었다. 지구는 은하계에 떠 있는 작은 행성으로 자전을 하며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 그래서 정의와 사랑의 힘으로 세상은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랑의 힘만 있으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홍이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홍이의 눈동자는 복잡한 우주를 이루고 있었다. 아름다운 까만 눈동자 속에는 무수한 줄기 모양이 파도치고 있다. 살아 있는 신비가 거기에 있었다. 

아직 이 별에 바다와 땅이 없었을 때 이 별은 하나의 뜨거운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는걸.

그때 우리는 그저 티 없이 맑게 빛나는 쌍둥이별이었다.

 

 

2024.11.17. SUNDAY

꿈이 차츰차츰 무너져 내려 작은 구멍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밝은 미래에도 검은 구름이 끼게 되었다. 평온한 미래라도 거친 파도가 일 때가 있다. 이것들은 자연 현상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힘을 합해 서로를 의지해야 했으나, 서로에게 너무 응석을 부리거나 두 사람이 너무 가까이 있었기에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일이 늘었고, 객관적으로 상대방을 볼 수 없게 되었으며, 소중한 것과 필요한 것을 지나쳐 버리는 일이 많아졌다.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유 따위는 없을지 모른다.

결국 홍이의 그런 외로움을 내가 채워 주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때, 두 사람의 사랑도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까지 이렇게 마음이 담긴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등으로 홍이의 온기가 전해진다. 홍이는 내게 완전히 몸을 의지하고 있다. 나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멀어지기 시작한 두 사람의 마음을 비끄러매기 위해 전속력으로 페달을 밟았다.

그것뿐이다.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어쩔 수없는 관계도 있는 거다. 우린 둘 다 표현을 하는 사람이니까. 

그건 이미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홍이 마음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녀의 고독을 대체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어쨌든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보지 못하면서도 조금씩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홍이의 시선은 안으로 잦아들어 갔다. 미소를 짓고 있어도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닌 멍한 미소를 띠는 일이 늘어 갔다. 고독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쓸쓸함은 사랑을 약하게 만든다. 슬픔은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거기에 젊음이 더해지면 모든 것이 위태로워진다.

누군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른다. 먼 기억의 바다 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마음속에서는 고개를 떨어뜨린 최홍의 슬픈 얼굴이 떠나지 않는다. 먼 하늘을 응시하던 홍이의 공허한 눈빛만이 떠오른다. 슬픔을 닦아 내듯 무심코 등 뒤를 돌아보았다.

 

 

2024.11.18. MONDAY

“당신을 데리러 온 거야.”

한 편의 시를 읊는 듯한 칸나의 낮고 힘 있는 목소리에 마음속에 있던 모든 말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감정의 호흡마저 잊고 만다.

“당신이 날 한 번 더 사랑하게 되길 칠 년이나 기다렸어.”

“추억에 매달려 사는 사람을 보면 슬퍼져.”
“그건 내 얘기구나.”

칸나는 시선을 피해 뮤지션들이 사라진 무대에 해변의 표류물처럼 남겨진 악기들을 쳐다본다.

“시차?”
“추억이 아닌, 지금을 살고 있는 나를 봐줘.”

손목에 찬 카르띠에 시계가 은빛으로 빛난다. 초침이 없는 시계인데 왠지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또다시 시간이 멈춘다. 두 사람이 토해 내는 하얀 입김이 서로 얽히고 뒤섞여, 그곳에 안개처럼 그리운 시간의 모습을 그려 낸다.

문학의 종말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리고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작가들에게

“어디를 가든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뭘 초조해하는 건지. 나답지 않은 것 같아. 이런 거 정말 싫다.”

“그때 준고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지금도 기억해. 그 마음을 되찾기가 이렇게 어려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그렇잖아, 소설가는 내일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불안정한 존재인데.”

“그때 나는 어린애였어. 겨우 스물 고만한 나이에 뭘 알았겠어.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 서른을 눈앞에 두고 이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어. 부탁이야,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날 비교하지 말아 줘.”

칸나의 말로 겨우 추억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일 년간 나는 칸나를 사랑했었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 내 안에는 칸나에 대한 추억이 있다. 그것들은 희미하며,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으며, 유치하고 잔인하고 사랑스러운 것들뿐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린 시절의 기억 못잖은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마치 색 바랜 청춘의 낙서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홍이와의 추억은 생생하고 쓰라리며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뿐이다. 같은 시간이 거기에도 흘렀으나, 이쪽은 마르지 않는 수맥을 더듬어 가듯 살아 있는 기억들뿐이다. 앨범 속의 오래된 사진이 아닌 지금도 퇴색하지 않고 움직이는 필름과 같은 선명한 영상이다.

불타는 듯한 시선이 내 눈동자에 꽂힌다. 그 시선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 함부로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응시할 수도 없어 나는 몰래 한숨을 몰아쉰다.

“소설의 세계는 점점 변해 가고 있네.”

“하지만 서글퍼질 때가 있어. 어딜 가나 서로 발목을 끌어당기는 세상이니.”

달지만 센 술이다. 위와 영혼을 같이 씻어 주는 것 같다.

 

 

2024.11.19. TUESDAY

“널 사랑할 수 없게 된 것뿐이야. 더 이상의 이유는 없어.”

어째서 사랑할 수 없게 되었느냐고 추궁했다. 칸나는 겨우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유는 나도 몰라. 갑자기 식어 버렸어. 더 이상 널 사랑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든 것뿐이야. 그런 느낌 또한 진실이고.”
“그건 말이 안 돼.”
“그래, 준고. 말이 안 돼, 이런 건 이유가 없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또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세상의 부조리하고 일그러진 숨은 모습을 본 그날 밤부터, 나는 번민의 밤과 우울한 낮을 맞게 되었다.

나는 물어보고 싶었다.

“그때 왜 날 사랑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됐니?”

칸나가 고개를 들고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기억의 빛이 겹겹이 교차하며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그녀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우리는 과거의 빛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모르겠어. 그땐 갑자기 당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당신을 언제까지고 사랑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

순간 나는 최홍의 웃는 얼굴을 떠올린다. 그 웃는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바람이 갈대밭을 흔든다. 호수 가장자리의 엷은 얼음은 내가 하려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를 말해 준다.

바람에 갈대가 흔들린다. 다른 생각을 한 사이 내 곁을 달려간 사람이 있었다. 놀라 바라보았지만, 역시 홍이는 아니었다. 분당 거리를 바라본다. 마음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마음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꼭 만날 수 있어, 하고 스스로를 타이른다.

그래도 그때가 우리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들과 그로 인한 불안이 있었지만, 어렸기에 무엇을 하든 무엇을 보든 무슨 생각을 하든 그저 즐겁기만 했다.

시가노의 대나무숲 길에서 우리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받으며 달콤한 입맞춤을 했다. 바닷속에서 하는 키스처럼, 물결처럼 출렁이는 햇살은 우리를 취하게 했다. 나도 홍이도 자신들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어 영혼을 빼앗기고 있었다. 기쁨의 절정이라는 말이 그때의 우리에게는 딱 맞았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존재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서로의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가노의 어둠 속에서 나와 홍이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내 팔 안에 홍이가 있었다. 그때 우리는 소리 없이 다가오는 불안한 그림자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평온한 얼굴로 자는 홍이를 조용히 끌어안고 행복에 겨운 나는 당장이라도 깰 것 같은 얕은 잠 속으로 빠져 갔다.

“아무리 힘들어도 진실된 마음을 가져야 해요. 알겠어요? 사랑은 결국 마음이죠.”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대나무숲 속에서 넋을 놓고 혼자서 울었다.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말았어요.”
“그분은 언제나 빛이 났죠. 그 곁에서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루어질 수 있는 소망이 아니었기에 혼자서 이렇게 살아온 거예요. 그러나 한시도 그분을 잊은 적이 없고, 지금도 존경하고 있어요.”

놓인 입장과 시대, 만남과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 다른데도 네 사람의 영혼에는 같은 빛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그 다정함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죠. 그분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난생처음 남자의 훌륭함이란 것도 알게 되었죠. 그래서 그분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난 울어버렸어요. 단지 그분의 팬으로서 많이 울었죠.”

“한국은 바로 지척, 바다만 건너면 되는 곳이에요. 마음만 있으면 금방이라도 갈 수 있는 곳이죠. 문제는 준고 씨와 홍이 씨 마음이 솔직하게 만날 수 있는 순간을 찾는 것뿐이죠. 젊은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요. 다시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건 단 하나, 바로 용기예요.”

시즈코 씨는 지나간 날들의 빛을 바라보듯, 

“내게는 그게 부족했어요. 내게 용기가 있었다면 내 마음을 최한 씨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덧붙였다.

 

 

2024.11.20. WEDNESDAY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알 수는 없지만, 뇌보다 반사 신경이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숨이 멎고 시선은 얼어붙었으며 소리도 사라졌다. 기억 속에 살아 있던 한 점이 차차 사람의 형태로 부풀어 오르더니 이윽고 달리기를 하는 홍이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그날 홍이는 붉어진 얼굴로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면 되잖아, 하고 항의했다. 그날 홍이는 달릴 때는 아무 생각 안 해도 되니까 좋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날 홍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일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나요? 하고 서툰 일본어로 물었다. 그날 내가 받쳐 든 우산 속에서 홍이는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는 걸 믿느냐고 물었다. 그날, 그날, 그날……. 모든 것이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 순간의 연속 속에 모든 것이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있다고 깨닫기도 전에 한순간은 사라지고 말았다. 순간은 영원이다. 영원이 순간이듯이.

그 순간 나는 무수한 역사의 단편들을 보았다. 눈앞에서 방대한 역사의 퇴적들이, 그리고 역사의 순간들이 다가오고 있다. 순간의 연속들이 도미노처럼 나를 향해 밀려온다. 그 모든 것이 나를 향해 넘어지듯 달려온다.

시간이 정지된 우주 공간의 무중력 상태에서 우리 둘은 마주하고 있다. 위도 아래도 빛도 소리도 없으며, 거리도 높이도 없는 시공간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다가오려 하는지, 멀어지려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별의 파편이다. 원래는 하나였던 별의 파편. 중력에 끌려가며 다음 순간, 빅뱅의 예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파편, 홍이는 나를, 나는 홍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홍이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 영원은 무참하게 지워지고 나는 다시 순간으로 돌아왔다.

홍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다른 궤도에서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같은 궤도를 돌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이미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수백 년을 한순간에 살아 낸 사람처럼 에너지를 소진한 나는 내내 그 자리에 못 박혀 있다. 갈대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는 산책로를 멍하니 바라보며. 멀어져 가는 그녀의 발소리만이 내 귓가에 닿았지만 그것마저 조금씩 멀어져 갔다. 단숨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홍이가 내 곁을 지나친 순간, 나는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났음을 깨달았다. 칠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에야 나는 겨우 사랑의 종말을 느낄 수 있었다.

교차로로 나와 주위를 둘러본다. 롯폰기나 신주쿠에 있는 교차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주변의 간판이 일본어가 아니고 모두 한글이란 것뿐. 하지만 그 차이는 열쇠가 열쇠 구멍에 들어가지 않는 것같이 당혹스럽게 느껴진다.

“어땠어? 어떤 한순간이었어?”
“반가웠어?”
“반갑다고 느낄 만한 시간은 없었어. 정말 한순간이었는걸.”
“한순간?”
“그래.”

그 무한의 신호를 나는 그때 홍이에게 전해 받은 것이다. 그 방대한 정보 탓에 내 사고는 정지되고 말았다. 처음에 느꼈던 것은 사랑의 종말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달려오는 홍이와 나누었던 시선이 그 속도로 인해 끊어졌을 때, 나는 현실의 잔혹함을 절감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람이 일어 내 육체는 홍이의 잔상에 기대어 그녀가 남기고 간 것들을 주워 모았다. 그 추억 속에는 희미하지만 희망이 있고, 조금이지만 내일이 그리고 미래가 있다. 모래사장에 웅크리고 앉아 모래를 긁어모으듯 나는 홍이가 남기고 간 방대한 정보를 끌어안게 된 것이다.

도대체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전후 육십 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왔단 말인가.

사인을 하면서도 가끔 한숨 돌리는 척하며 나는 고개를 들어 어디에선가 홍이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을까 주변을 살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어디엔가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는 나 자신이 처량했다.

단지 내 마음을 홍이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오로지 한 사람을 향한 후회와 지울 수 없는 추억 때문에 쓴 것이다…….

뭘 하는 사람일까 상상해 보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른 세상에서 온, 혹은 인간 세상의 모순을 지켜보기 위해 하늘에서 보낸 천사 같기도 하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 사람이 홍이의 연인이라면, 지금의 행복을 지키려는 그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일부러 사인회장에 찾아와 자신이 홍이의 연인이라고 말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나는 이해한다. 그 미소 뒤에 감추고 있을 흔들리는 마음의 벽을 상상하니 괴로워진다.

“갑자기 찾아와 놀라게 했군요.”
“아뇨, 당신과 만날 수 있어 내 마음도 확실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실은 오늘 밤……. 오늘 밤 저는 홍이에게 청혼할 겁니다.”

느닷없이 엄청난 바람이 몰아닥친다. 홍이가 내 곁을 달려간다. 몇 명이나 되는 홍이가 바로 내 옆을 달려간다. 나는 온힘을 다해 되돌아보려 하지만 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제는 돌아갈 수가 없다. 나는 강남의 지하 광장 의자에 묶인 채 지나가는 무수한 홍이를 그냥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 저는 홍이에게 청혼할 겁니다.”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김민준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를 쳐다보고 있다. 불과 몇 초밖에 되지 않은 시간을 마치 몇천 년처럼 느끼며.

“준고.” 홍이의 목소리다. “준고.” 홍이의 미소를 떠올린다. 떠오르는 건 아름다운 계절과 아름다운 시간뿐이다.

남자가 떠난 후에는 마음을 담을 수가 없어 사인은 기계적인 작업이 되었다. 오늘 밤 저 남자는 청혼을 한다. 저 남자가 홍이에게……. 그들이 쌓아 온 긴 시간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다. 그는 일부러 내게 그 사실을 알리러 왔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보이는 건 빛뿐이다. 여기가 어디든 나는 더 이상 상관이 없었다. 쏟아지는 빛을 더듬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빛으로 된 벨벳 커튼을 바라보는 것같이 눈이 부시다. 빛의 줄기가 나를 향해 한없이 쏟아진다. 나는 의식을 잃을 뻔했다.

이러한 타이밍이 누구에 의해 마련된 것인지 생각해 ㅁ볼 필요가 있다. 하늘의 의지일지도 모른다.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하늘은 내게 이런 시련을 준비한 것일까. 이 찬 공기로 나는 영혼을 씻어야 한다. 그 사람의 행복을 비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바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빛이 깜박였다. 나는 그 빛이 전하려는 뜻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2024.11.21. THURSDAY

세상이 하루하루, 아니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안정된 것들도 모래산 위에 꽂은 깃발처럼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것이 아닐까. 나와 홍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날도 우리는 베토벤의 「비창」을 듣고 있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이별의 발자국 소리는 그 부드러운 멜로디에 가려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실은 다정함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홍이는 내게 등을 돌리고 자는 일이 많아졌다.

“날 혼자 내버려 뒀잖아.” 홍이는 늘 그렇게 말했다.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마, 하고 화해를 할 때면 반드시 그런 약속을 하게 했다.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혼자 두지 마, 하고 부탁한 적도 있다. 홍이를 혼자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홍이가 스스로 내 아파트에 온 다음에는 항상 같은 침대에서 품에 안고 잠이 들었으며 함께 아침을 맞았으니까. 홍이가 왜 그렇게 느끼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홍이가 말하는 혼자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떠난 뒤였다. 우리는 행복의 절정에서부터 이렇게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홍이의 고독을 단 하나도 이해해 주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자기 생각만 주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그건 쌓이고 쌓인 그녀의 고독 탓이었고, 말하자면 곁에 있는 내게 원인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치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아르바이트로 쫓기는 일상에 나 역시 지쳐 있었는지 모른다. 동거라는 이름의 인생의 시작에도.

그건 전부 내 탓이었다.

나와 홍이 사이에는 그때까지 한 번도 역사가 그림자를 드리운 적이 없었다. 우리는 젊었기에 역사의 불행을 극복할 자신이 있었고,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나라를 짊어진 사랑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리고 1998년 장마가 시작되던 유월 어느 날로 이어진 것이다. 기억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속을 조용히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우리 둘은 뜻하지 않은 이별을 맞이했다. 그건 느닷없이 들이닥친 것이 아니라 쌓이고 쌓인 고독과 오해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의 마지막 날은 기정사실로 두 사람 앞에 다가온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곳에 와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벌어진 틈을 다시 좁힐 수 있다고 믿었다. 어렸기에 무모할 정도로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마저 곧 원래 상태로 회복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은 오래전부터 홍이와 외식을 하기로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홍이의 낮은 목소리가 엷은 어둠을 흔들었다.

“그래도 전화 한 통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아?”
“너무 바빠서 어쩔 수가 없었어.”

둘 다 뭔가 참고 있는 것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젊음으로는 결코 메울 수 없는 무언가, 사랑만으로는 서로를 지탱할 수 없는 무언가…….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내가 말했었지. 기억나? 나는 외국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어째서 무책임하게 결혼하자는 말을 했어? 나를 외톨이로 내버려 둘 거면서. 제대로 사과도 안 할 거면서. 날 혼자 내버려 두고…….”

나는 그제야 내가 벌여 놓은 일을 깨달았다. 바로 내 곁에서 죽어 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있었다. 말수가 적고, 말을 믿지 못하는 고독한 청년으로. 온몸의 힘이 빠지고 의식이 멀어져 갔다. 여기서 내가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항상 홍이의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어느새 나는 그녀의 가장 큰 적이 되어 있었다.

 

 

2024.11.22. FRIDAY

홍이가 쏟아낸 말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발버둥 쳤다. 거칠게 갈라진 마음에 밤바람이 스며들었다. 

최한이 홍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분당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분위기도 공기도 달랐다. 혼이 빠진 인형 같은 얼굴로 아버지 곁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이 내 서른 번째 생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홍이가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렸다. / 내가 매년 구월 십삼일, 홍이의 생일에 먼 하늘을 바라보며 홍이를 그리워한 것처럼.

“실은 예전에 정말 좋아했던 한국 여자가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그녀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지요.”

홍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눈동자 깊은 곳에 차마 다 숨기지 못하고 쌓아 둔 거짓을 찾아내고 만다. 홍이가 입을 열었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건 선생님의 사랑이 거짓이었다는 거군요.”

가위로 가슴 한쪽을 잘라 낸 것 같은 아픔이 남았다. 애써 듣는 척하지만 마음은 그곳에 없었다.

어째서 뛰어나가 그녀를 막지 못하는지. 어째서 또다시 겁쟁이가 되려고 하는지!

칸나는 편집자답게 언제나 재빠르게 궤도를 수정한다. 원고를 수정하듯 인생에 대해서도. 빨간 글자를 집어넣거나 지우개로 지워 바른말을 정확한 자리에 적용해 가는 것이다.

“싫어, 내가 지금 방을 나간다면 나는 당신을 완전히 잃고 말 거야.”
“단 한 번의 잘못을 그렇게 계속 나무라지 마. 난 이미 몇 년 동안이나 너만 바라보고 있잖아.”
“그래, 고마워.”

나는 가능한 한 상냥하게 말하고는,

“그렇지만 난 널 사랑할 수가 없어.” 

하고 단호히 말했다. 칸나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남보다 몇 배나 자존심이 강한 여자가 겹겹의 자존심을 벗어던지고 울고 있다. 오열을 참으며 흐느껴 우는 칸나를 지켜보기가 괴롭다.

칸나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난 널 유명하게 만들어 놓을 거야, 하고 선언했다. 그리고 칸나는 매일같이 나를 찾아왔다.

“그럼 내 행복은 누가 빌어 주는데?”
“내가 빌어 줄게.”
“그런 거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너야. 내가 손에 넣고 싶은 건 너뿐이라고!”

고독한 우주에서 칸나는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한 그루의 나무였다. 칸나가 거기 서 있어서 나는 미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홍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칸나와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런대로 행복한 일이었을 것이다. 칸나가 내게 매달렸다. 그녀의 팔에는 익사하는 사람의 마지막 힘 같은 것이 배어 있다. 나는 슬퍼졌다. 내게는 그녀를 이렇게까지 만들 권리가 없었다.

“넌 내가 만들었어. 넌 내 빛이야. 내 모든 거라고. 난 내 행복만을 위해 빌 거야.”
“칸나. 더 이상 네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하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을 때도 있어. 내 마음은 내 거니까.”

홍이를 마음속 등불로 밝혀 두고 그 자그마한 빛에 의지해 긴 시간 동안을 난 써 내려갔다. 홍이와 헤어진 후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나 자신을 매어 둘 수 있었다.

인간은 한 점 부끄럼 없는 길을 걸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를 바랄 수 있다. 특히 순수한 감정을 지닌 젊은이에게는 가능한 일일 것이다. 거기에는 무모함이 있고, 진실만을 바라보려는 맑은 정신이 있고, 인간의 본질이 있다. 나는 한 점 부끄럼 없는 인생을 걷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를 읽고 그렇게 간단히 단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무렵 나는 오로지 원고지에 매달려 소설을 썼다. 젊은이들의 집단 자살이 끊이지 않는 병든 시대의 슬픔을 짊어지고, 그 원인이나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는 어른들의 변함없는 무책임함을 곁눈으로 바라보며 내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으며, 어떤 말을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할지를 작품 속에 투영하려고 했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그저 묵묵히 소설을 향해 걸었던 나. 퇴고를 거듭한 작품이 어느 정도의 가치와 의미가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채 중력도 인력도 없는 우주 한가운데에서 나는 소설을 썼다. 또한 그러한 내가 도대체 누구인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나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가르쳐 줄까?”
“홍이가 떠날 때 붙잡지도 못한 제가 이제 와서 뻔뻔스럽게 전화 같은 걸 할 수는 없어요.”
“그럼 대체 어떻게 그 마음을 전할 생각인데?”

난 소설을 쓰고 있어요, 하고 말했다. 사에키 시즈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을 하고도 나는 본명이 아닌 필명으로 소설을 썼다. 그런 나의 마음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어딘가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늘 끝에 가서 자신을 잃고 만다.

“어쩜 그렇게도 태평한지. 하지만 준고의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넌 모든 것이 간단하게 처리되는 게 싫은 거지. 그래서 말을 믿지도 않으면서 소설을 쓰는 거고.”

“그 마음에 거짓이 없다면 작품은 바다를 건너 홍이 손에도 닿을 거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모든 걸 걸어 보고 싶고요.”

 

 

2024.11.23. SATURDAY

나는 놀라 눈을 떴다. 꿈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슬픈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바야시 칸나를 태운 택시가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한다. 칸나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흔든다. 가늘고 흰 손가락 끝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어떤 얼굴로 어떤 마음으로 그녀가 손을 흔들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멘다. 까만 택시 차창으로 내민 흰 손이 내게 작별을 고한다. 안녕, 안녕, 하고 손이 말한다.

좀 더 걸어 보고 싶었다. 이 길 어딘가에서 우연히 홍이와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래도 나는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서울 어디에 있든 나는 홍이를 생각할 수 있다. 그날의 홍이가 되어 사랑하는 이의 조국을 느낄 수가 있다.

도대체 그들과 나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혹은 무엇이 없을까. 나는 내가 누군지 내 정체성의 근간을 점점 알 수가 없다.

성급한 별이 서울 타워 위에서 깜박이고 있다. 그 별을 홍이인 양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잔을 비워 간다.

희미하지만 홍이가 토해 내는 한숨이 거칠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뭔가 고민을 하는 것 같다. 나는 필사적으로 수화기에 귀를 대고 조금이나마 그 뒤에 감추어진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홍이가 침묵을 깼다. 나는 엉겁결에 뭐라고? 하고 되묻고 만다.

“청혼을 받아들인다고?”
“그래.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한숨도 탄식도 오열도 아닌, 그것들이 한데 얽히고설킨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주위는 절망으로 채워졌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기적적인 재회는 두 사람의 관계를 확실하게 끝내기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기대했던 감정의 줄이 끊어지자 나는 어둠 속을 떠돈다.

이번에는 내가 홍이를 축복할 차례였다. 분명히 세상은 그렇게 평화로워져야 했다.

“……축하한다.”
“고마워, 조심해서 가.”
“그래, 그럴게. 홍, 행복해라.”

말문이 막혔다. 칸나처럼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 수가 없다. 당장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나는 금방 주저앉아 울 것 같다. 눈물이 제멋대로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숨을 멈추고 감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참는다.

“꼭 행복해야 된다.”

말을 끝내고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남산을 돌아보며 아무 주저 없이 울었다.

이는 새로운 아침의 시작인 동시에 지나간 시간의 종말이기도 했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다.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나는 한강의 용에게 손을 모은다. 신앙과는 인연이 먼 내가 손을 모아 상상 속의 용에게 빌고 있다. 눈꺼풀 위로 강물에 반사된 빛이 느껴진다. 용이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 눈을 뜨고 흐르는 강 끝을 응시한다. 눈부신 빛 저편에서 뒤척이는 용의 꼬리를 본 듯하다.

홍이와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은 없다. 비록 홍이를 만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자신을 타이른다.

햇살이 가냘픈 것을 보니 창밖의 추위가 전해져 온다. 나는 아득한 날들을 되돌아본다.

우리는 어쩐 일인지 처음부터 시선을 맞추었다. 거기에는 생각지 못한 운명이 숨어 있었지만, 그때의 우리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홍이의 시선이 어떤 예감과 함께 내 마음을 휘감았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게 되었다. 평온한 시작이었으나, 그 작은 만남 뒤에 두 나라를 걸친 운명적인 사랑과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의 기적이 둘을 만나게 한 것처럼 또 몇 번의 기적이 더해져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이것이 신의 못된 장난인지, 아니면 예정된 운명인지 나는 지금 그것을 확인하려 한다.

빛이 차창을 흐른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멈출 수 있는 건 신뿐이다. 나는 운명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날 나는 홍이를 만날 수 없는 괴로움에 잠을 설쳤다. 구멍이 뚫려 버린 가슴속으로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밖은 맑게 개어 있는데 내 가슴속은 얼어붙어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달렸다. 홍이는 어떤 마음으로 달렸을까. 그녀 마음에 가까이 가려면 그날의 홍이가 되어 달려야 했다.

홍이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사는 고독과 싸우며 매일 이렇게 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달리는 그녀의 마음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웠다.

“사람이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죠. 상대방의 마음을 제멋대로 거짓으로 꾸미는 게 보통이에요.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햇살이 내가 달릴 길을 비춘다. 호수면이 눈부셔 눈을 가늘게 뜬다. 이 괴로움을 닦아 내기 위해 나는 지금 달리고 있다. 내 영혼과 정신은 오직 한 사람, 최홍을 향하고 있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홍이와 가까워지고 있다. 내 마음을 전하는 것은 말이 아니다. 말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함께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 말은 그다음에 의미를 갖게 된다. 형식적으로 속이거나 순간을 모면하려고 얼버무려서는 마음을 비끄러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칠 년 동안 달려온 것이다. 홍이와 함께 달리고 싶다. 설령 거기에 더 이상의 미래가 없다 하더라도.

빛나는 햇살들 속에서 우리는 운명을 주고받았다. /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나누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좁혀져 간다. 과거가 현재로 밀려오듯, 그리고 미래로 더욱 확대되어 가듯.

“그때부터 계속 달렸어.”
“그때부터?”
“너와 헤어지고 나서 내내. 네 마음에 다가가려고 계속 달렸어.”

“그래. 정말로 달렸어. 그것밖엔 할 수가 없었거든. 말로 분명하게 설명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먼 길을 돌아오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계속 달렸기 때문에 그때 네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게 되었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넌 혼자서 달렸다는 걸……. 난 그때 너와 함께 달렸어야 했다. 난 너에 대해 뭐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알지 못했던 거야. 내가 생각이 모자랐어.”

지금 나는 홍이가 느꼈던 그 고독의 속도를 따라잡았다. 그녀의 외로움을 지금의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이것만은 사실이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그때 널 외롭게 해서.”
“아니, 우리가 잘못했어.”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우리는 서로 손을 잡았다. 홍이의 얼굴에 미소가 넘친다. 내 마음에 빛이 돌아왔다.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이대로 빛이 되어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