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16~1031 아가미

 

2024.10.16. WEDNESDAY

마른입이나 좀 적셨을 뿐인 알코올마저 휘발되고 나니, 내 몸을 통과하는 강바람이 얼마 뒤엔 나를 찢어놓을 거라는 짐작이 갔어요. (중략) 그러지 않고는 그 긴 다리를 건너는 동안 추위와 무서움을 이길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사람이, 그거 아세요? 자기 목소리에 자기가 취하고 밤공기는 머릿속에 섬광을 일으켜, 백주라면 결코 하지 않을 짓을 부추긴다는 걸요. 술도 안 들어간 채로 밤바다를 바라보며 아무도 안 듣는데 공연히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거나 소리 질러본 적 없으세요? 거봐요, 물이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한다니까요. 제 친구가 전면 베란다 창으로 강이 내다보이는 아파트에 살거든요? 그 애가 페이스북에 전망을 찍어 올려놓은 걸 보고 다들 부러워했는데, 의외로 전망 좋다고 너무 오랫동안 내다보고 있으면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바라보다 뛰어내리고 싶어진다며. 아무튼 모든 물결치는 소리는 세이렌의 노래라고요. 다리 중간쯤 가다 말고 흐르는 강물을 향해, 오늘 만난 모든 인간들의 이름과 직책을 하나하나 부르고 그들에게 각각 다른 죽음의 방식을 지정해가면서 저주한 건 그 때문이에요.

바로 옆으로 새벽 버스가 질주하면서 그렇게 갑자기 경적을 길게 울리지만 않았다면요. 그 신경질적인 포효가 형태와 부피를 갖고 내 몸을 밀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손에 그나마 남아 있던 악력과 마찰력이 떨어져나갔어요.

그 목소리는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소리와도 닮지 않았고 컴퓨터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어요. 분명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소린데, 마치 맑은 공기가 그 사람의 몸속에 순간적으로 응결되었다가 굴절과 파열을 반복한 끝에 가장 고운 성분만 걸러져 수많은 입자로 흩어지는 소리, 온몸이 떨림판이 되어 밤을 둘러싸거나 밤에 은닉한 모든 것들과 부딪쳐 공명하는 소리였어요.

뇌수까지 얼어버릴 것 같았지만 그 순간 정신은 갓 세공된 거울만큼 맑고 감각은 사포로 벼린 송곳처럼 예리했어요.

강물 위에 부걱거리는 수많은 거품 가운데 무엇이 그가 뿜어 올리는 공기 방울인지 알 수 없었어요.

자, 저는 그것이 사람이었든 물고기였든 혹은 네시였어도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그가 저한테 한 번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저는 집에 가서 엄마를 돌보며 필사적으로 돈을 벌고 재계약에 성공해야 한다는 사실뿐이에요. 다음에는 정말 이런 일이 있으려야 있을 수도 없겠지만, 또다시 물에 빠진다면 인어 왕자를 두 번 만나는 행운이란 없을 테니 열심히 두 팔을 휘저어 나갈 거예요.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2024.10.17. THURSDAY

차 문을 열고 내린 남자의 코끝에 들꽃 냄새가 내려앉았고 밤의 술렁임은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미지의 움직임과 생경한 촉각들은 밤의 마디마디에서 저마다 기지개를 켰다.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지금까지 이 앞에서 몇 번을 돌아섰는지 남자는 세어보지 않았다. 피부에 찬 물기가 닿을 때마다 말라비틀어진 과육 같던 심장이 의욕적으로 뛰었던 기억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속아보자던, 믿어보자던 기대들 혹은 체념들. 어둠 속에서 수증기가 낱낱의 모공을 열어 속속들이 세척하고 나면 한때 묽어졌던 촉각이 다시 살아나 사고가 명료해지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긍정과 확신이 온몸을 채웠다.

그 확신은 현실의 문턱에 발등이 걸릴 때마다 엷어져서, 그것이 흔적만 남거나 시늉에 불과할 때쯤 남자는 밤 호수에 가서 같은 일을 반복하곤 했다.

꼽아보면 세상 어디든 흔히 있는 일이었고, 그것이 한 사람에게 연쇄적으로 닥쳐오는 일도 그리 드물지 않았으며 한 가지 불행은 철저하게 다른 연속된 고통의 원인이나 빌미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 순간 남자의 머릿속을 팽팽하게 당겨 현실에 붙들어두었던 한 가닥 극세사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말이 늦었고 무해했고 다정했다. 떼를 쓰거나 외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한 뼘만큼의 공간을 잘 참아내는 아이였다.

남자가 검은 물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면서 문득 떠올린 것은, 자신은 여기까지이나 아이는 어쩌면 어딘가에 맡겨져서 무사히 살아갈 수도 있으리라는 한 가닥 기대였다. 그러나 곧 세상에 홀로 남을 이 아이가 겪게 될, 종류와 정도를 가늠 못 할 폭력과 곤궁을 떠올렸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골몰하는 거야말로 무의미하나 가능성만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었으며,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가혹하고 비참한 일인지를 저울질하다가 결국 이 아이에게 삶이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더 늘리는 일에 불과하다는 결론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이 아이의 앞날은 뜨거운 물에 뿌려진 한 줌 설탕의 운명만큼이나 명백해 보였다.

재생 불량성 절망에 빠진 세상의 모든 인간이 이리로 모여들기라도 하는지

뚝뚝 듣는 물기를 뒤집어쓴 상처가 다시금 꽃잎이 열리듯, 콩 껍질이 갈라지듯 살며시 벌어졌다. 석류 열매처럼 드러난 속살의 두근거림은 명백히 생명의 움직임이었다. 아물어가는 상처가 억지로 쑤셔진 모습이 아니라, 희박한 산소를 찾아 호흡하려는 태곳적 기관의 발현이자 몸부림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와 무관한 존재, 상식을 교란시키는 피조물을 접한 소년의 마음은 뜻밖에도 평온하고 일상적이었다. 거기에 자신이 그런 존재를 구하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은 어린 소년에게는 일종의 영예로 다가와 도취 비슷한 감각마저 전해 주었는데, 소년은 당시에는 그와 같은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랐다.

그건 훗날 이 아이가 제대로 된 비늘과 함께 철갑상어의 옆구리에 수놓인 금빛 바늘땀 같은 줄무늬를 갖게 되리라는 예고처럼 보이기도 했다.

 

 

2024.10.18. FRIDAY

곤은 자신이 언제부터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왔는지를 헤아리지 않았다. 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많은 일들을 꼭 당일 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 그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  모두 어제가 되어 부질없어진 인물과 사건의 나열들. 현재까지 여파를 미치고는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라 부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흐름들. 그는 과거를 명시하는 글자들을 단지 무료함으로 죽지 않기 위해서만 내려다보았다. 그가 어제의 세계를 읽는 동안 실제 세계는 변화와 요동과 전복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는 무언가를 숨 가쁘게 따라잡는 삶과 거리가 멀었다. 고인 물이나 응결된 얼음만큼의 비중을 간직하며 급속 냉각되어 빙산에 갇힌 의식만을 유지하고 살아갈, 꼭 그만큼의 열량만 있으면 되는 나날들.

그러다 삶의 마지막 날이 온다면 필히 물속에서 죽으리라.

충분히 데워져 있던 물은 오래지 않아 만단설화를 꽃피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끓어올랐다.

그는 커피를 타는 동안 손님의 시선이 줄곧 자기한테서 떠나지 않는 것을 옆얼굴로 알아차리면서, 상대의 눈빛에 담긴 의미가 호의인지 적대감인지 단순한 호기심인지 그것도 아니면 착시의 일종일 뿐인지를 판단하느라 느릿느릿 움직였다.

“좋을 때다.” 지나간 시절의 윤곽을 더듬는 듯한 손님의 혼잣말은 나지막하고 분명했으므로 뭐라고 대꾸를 해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가요.” 곤은 손님과 단둘이 좁은 공간에서 말을 섞게 된 데 대한 불편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단지 저 나이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면 저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요. 저러다가 다들 울거나 언성이 높아지다가 결국 주먹이 나가고 마지막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강에다 토하거든요.”
“가까이서 저런 걸 늘 보시는 분은 불쾌하긴 하겠어요. 결국 치우는 사람 따로 있고, 번거롭고 더럽고.”
“더러운 것보다도 슬퍼 보여서요.”
“네? 정말로 슬프거나 최악의 상황에 놓여 더 이상 아무것도 지킬 것도 버릴 것도 없는 사람은 저렇게 술에 취해 소리칠 기운도 없을걸요. 제 눈에는 약간 불행을 전시하는 걸로 비치기도 해요.”

곤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슬프다고 한 건, 저렇게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만큼 사람들마다 삶의 무게가 비슷하구나 싶어서입니다.”

“그건 그러네요.” 손님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곤은 정정도 부연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누구든 자신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눈길은 언제나 일종의 질문 내지는 추궁 같았고, 자신의 손끝으로 부순 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창문 같았다.

고요와 침묵으로 빚어진, 흘러가는 시간의 공평하고 차가운 숨결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선택하리라는 막연한 짐작만은 있었다.

삶으로부터 철저히 유리되기를 시도하기엔 여건이 맞지 않았다.

게다가 이름이란 게 성격을 넘어 그 사람의 인생을 압축 및 지배하는 주문이 된다는 미신적 사고에 비추어보면 그녀의 이름은 결코 물에서 죽을 사람 같지 않았다. 한자리에 머무는 법 없는 바다의 흐름. 팽창하여 넘실거리는 물결의 긴장. 파도의 애무. 하백의 입김. 그 밖에도 그 이름은 서로를 향해 몸을 부대끼다 부서지는 물방울의 내밀한 언어를 떠올리게 했으며, 그토록 낭만적인 이름을 지닌 사람이 하필이면 그 이름의 뜻을 담은 물에 스스로를 포기할 리 없었다.

그러나 그런 오해를 받더라도 혹시 있을지 모를 누군가의 감정적 표류를 잦아들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괜찮은 일은 없을 터였다.

성별과 인원 무관하게 곤은 사람을 대하는 일, 특히 단순 과정의 반복 훈련으로 습득 가능한 격식과 절차보다 즉흥적 판단과 선험적 사교성을 필요로 하는 일 자체가 익숙지 않았다. (중략) 적어도 눈을 마주치고 맥락 없는 대화를 나누는 행위를 포함한다면, 진정한 의미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풍성하지만 제멋대로 뻗어 정돈된 느낌 없이 시야에 쏟아져 들어올 뿐이니 경관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위압 내지는 맹목에 가깝기도 하지요. 아,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강을 싫어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가게가 강을 바로 앞에 두고 있어서 운이 좋은걸요. 정돈되지 않은 숲은 보잘것없지만 인공적이지 않아서 좋고요. 흘러가는 강은 어떤 사진이나 그림에도 담아 가둘 수 없고, 강줄기를 따라 우거진 수풀 또한 그렇지요. 그게 사람들이 강으로 오는 이유 같습니다.
그럼 강을 보고 싶어요.

사실 그들에게 붙은, 언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은 임의의 이름 같은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살아 있었고, 살아 있는 건 언제 어디서라도 그걸 부르는 자에 의해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었으며, 곤에게 의미 있는 건 그것을 뭐라고 부르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오래도록 또는 눈부시게 살아 숨 쉬는지였다.

몇 년에 한 번 꼴로 한두 구씩 절망의 무늬를 그리듯 수면에 떠오르곤 하는 사람들.

아름다움으로 넘치는 유동성의 세계. 기슭에 닿아 부서지는 물거품을 밟고 깊이 들어갈수록 드러나는 징청과 피안의 세계를.

“그 시간과 공간을 프레임 안에 박제하는 것만이 여행인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적어도 목적이 있어요.” 

어떤 종류라도 도무지 목적이라는 낱말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이 평범한 강마을에 말이지. 호수에 그려진 파문처럼 곤의 마음속에 느릿한 일렁임이 솟아오르다 경사가 급한 계곡물이 흐르듯 좀 더 빠르게 수런거렸다.

“찾는 사람이 있어요.”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곤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휘날리며 내내 덮고 있던 목덜미가 드러났다. 곤은 뒤에 해류가 따라온다는 생각에 머리카락을 끌어당겨 귀 뒤를 덮으려 했으나 이미 해류의 손이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감추지 마요.”

곤은 뒤돌아서서 물빛으로 질린 얼굴을 숨기지도 못한 채 손목을 잡아 뽑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2024.10.19. SATURDAY

다음에 이어질 말이 뭐가 되었든 곤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온몸 구석구석에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던 지느러미가 소스라쳐서 일어날 것만 같았으며, 이대로 강에 뛰어들어 그녀 손이 닿을 수 없는 어딘가로 헤엄쳐 가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전율을 익숙한 감각으로 중화하는 데에 강물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그녀는 다음 말을 이을 때 결코 깨뜨려선 안 되는 알을 품었다가 부화할 때가 지나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는 새처럼, 소중하고 찬란하여 차마 입 밖으로 발설함으로써 훼손할 수 없는 이름이라는 듯이 주의 깊게 숨을 고르고 나서야 이렇게 천천히 떼어 물었다. “강하를, 알지요?”

강하는 아이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아이는 세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모두 알아들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얼굴에 묻은 의혹이 절망과 한데 겹치면서 서서히 응고되어가고 있었다. 비록 그렇지 않은 가정이 세상에는 더 많다 하더라도, 아이란 한 집안의 부서지는 관계를 지탱하는 일종의 축과 같다고 의사는 믿었다. 그 자체가 형식이자 내용인 존재가 아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사이사이에 닻을 내리는 것이며, 그런 아이에게는 제대로 된 사회적 명명이 부여되고 제도가 갖추어져야 했다. 의사가 보기에 강하네는 그것이 가능한 집안이 아니었다.

얘, 쟤 대신 아이를 곤이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노인은 아이가 정말로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버려졌음을 깨달았다.

설상가상으로 강하는 불과 여섯 달 사이에 곤의 몸에 희미하게 일어나는 변화를 발견했는데 처음에는 그저 실내조명의 영향인 줄로 알았다. 그러나 옷을 갈아입히면서 그 등에 반짝이는, 비늘로 간주하고 싶지는 않으나 결국 비늘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돋아나 한 조각 한 조각이 저마다 다른 반사각을 가지고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사람의 피부라기보다 잘 세공된 보석 같아 보였으며 곤이 세상의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은 특별한 생명체임을 증명하는 표지였다. 처음 곤이 이 집에 왔을 때는 분명 알아차리지 못했던 특징인 만큼 이는 서서히 생겨난 이변이라는 사실과, 문제의 아가미는 극한의 상황에서 후천적으로 돌연 발생했음을 귀납적으로 짐작하게 해주는 요소이기도 했다. 강하는 자기도 모르게 그 눈부신 빛더미에 손을 얹고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비치는 빛살과 그것이 만드는 색의 변화를 바라보았다. 그 색의 미묘한 변주는 엄마 곁에 있었을 적 꼭 한 번 가보았던 성당의 창문마다 고결하고 신성하게 빛나던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게 했다.

옛날 엄마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눈부신 것, 빛나는 것, 귀한 것, 좋은 것은 숨겨놓고 혼자만 아는 거야. 남하고 나누는게 아니란다. 그 말을 하고 일주일 뒤에 엄마는 분리수거를 미처 못 한 폐지처럼 외할아버지네 집에 강하를 떠넘겼더랬다.

그러므로 강하는 이 세상의 가시광선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새로운 신체 조직이 남들 눈에 쉽게 띄는 얼굴까지 번져나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남들이 보는 순간 더 이상 숨겨놓고 혼자만 아는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날. 
그 일이 없었더라면, 강하는 정체불명의 군식구를 번거로워하면서도 그의 신체적 운명과 가족의 부재를 동정하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고 기꺼이 감당했을 터였다. 생애 최초의 매스미디어를 불행의 방식으로 타게 되는 주워오는 아이. 그러나 아이는 그림 속 그럴듯한 구도 안에 정박한 과일이나 서책이 아니라 살아 숨 쉬고 움직이는 인간으로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점화 직전의 폭약이나 다름없었다.

 

 

2024.10.20. SUNDAY

소년의 외침이 메아리조차 일으키지 못하고 부서진 것과 무관하게 사람들은 이 광경에 사로잡혀 있었다. 상황부터가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저마다 얼굴에는 두려움을 통과한 매혹의 빛이 떠올랐다. 아이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몸짓은 흡사 수면에 입맞춤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지켜보던 이들의 마음속에서 이것이 긴급한 순간이라는 위기의식을 제거했다. 아이의 몸은 유리처럼 투명한 물속 공원으로 소풍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움직임과 함께 신비롭게 산란되는 단백광을 반사했고, 그 시각적 자극과 진한 물냄새로 인해 저 아이라면 어떻게든 해줄지도 모른다는 비현실적인 믿음과 일종의 신성하고도 경건한 감각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러기에 목격자들뿐 아니라 아기 아빠조차도 그 아이를 따라서 선뜻 호수에 뛰어들지 못했고 그 자리에 붙박여 홀린 듯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이 무사히 떠오르기를 바라는 인지상정이나, 여기 수심이 5미터라는 산술적인 현실 따위가 모두의 의식에서 지워진 듯했다.

강하도 자신이 나서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며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리라는 걸 알았지만, 아니 오히려 알았기에 심장에서부터 퍼져나가는 파동은 한층 더 격렬했다. 저 빌어먹을 물고기, 물고기, 물고기새끼! 정작 강하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결코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없는 호수의 바닥, 그 깊이였다. 자신이 가지 못하는 곳에 곤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거리감과, 언젠가는 곤이 정말로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다른 물고기 떼들 사이로 깊이깊이 헤엄쳐 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예감이 흔들고 지나간 미로의 바닥에는 길을 잃은 분노와 질투라는 이름의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수없이 겹이 덧씌워지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장면들이 상상의 틀에서 벗어나 현실로 방생되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성가신 새끼.” 강하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곤은 발뒤꿈치를 조금씩 드티며 물러나다가 두 벽의 모서리가 만나는 곳까지 닿아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지니 숨이 막혀서 기침하기 시작했다. 물속에서는 그토록 편안히 쉬어지는 숨이 어째서 이 순간 물 밖에서는 부자유한지, 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 빠진 사람 이전에 녹색 물과 살랑거리는 물풀과 그 안에서 몸을 뒤채는 물고기들이 손짓하는 양, 전후 맥락과 상황에 대한 아무런 판단도 계산도 없이 저절로 몸부터 움직이고 보는 추동에 대해 부족한 말로 어떻게든 표현할 기회를 주지 않고 강하는 곤의 머리카락을 잡아 일으켰다. “그렇게 물귀신이 되고 싶으면 아주 그냥 처박고 살아. 나오지 말고.”

사람은 자신의 몸에 입힌 기억이나 행위에 밀착되어 쉽게 벗어날 수 없었으며, 곤은 자신을 구해준 강하가 그렇게 즉흥적으로 부레가 끓어서 자신을 죽이지는 않으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2024.10.21. MONDAY

강하는 곤의 입부터 틀어막고 밖으로 끌어낸 다음 낮은 목소리로 잠자코 따라오라고 협박했고, 곤은 아직 꿈의 가장자리를 헤매는 눈꺼풀에서 두려움을 떨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발에 떠밀려 곤의 몸은 블랙홀에 흡수되는 한 점 별처럼 검은 호수 바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오감을 장착한 존재였을 살점들이 신속하게 허공을 날아 종이 접시에 착륙하여 따놓은 꽃잎 무더기처럼 소복하게 쌓이는 광경은 비현실적이었고, 곤의 눈에는 그 모든 과정이 대자연에 대한 공정치 못한 착취나 무분별한 도륙으로 보였다. 공포는 비린내와 함께 절정을 이루었다.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강하가 만약 뾰족하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그것이 강하였다. 단지 그뿐인 일이었다. 그 어느 쪽도 강하 그 자체였으며 자취 모를 부모의 존재는 어떤 모습에도 기능하지 않았다.

 

 

2024.10.22. TUESDAY

사실 그날의 흥분과 감격을, 누군가에게는 환상이지만 내게는 피부의 호흡과 내장의 활동만큼이나 현실이었던 그 사건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곧바로 올리고 싶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던 것이, 그래버리면 넘쳐흐르는 내 안의 이미지로 그날의 일을 윤색할 수도 있으니까 냉정을 되찾을 때까지, 내가 그날의 일을 제삼자의 감각으로 응시할 수 있을 때까지 지연시킨 거예요. 거기다 그 글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엉뚱한 호기심으로 당신을 수색하려 들 수 있으니, 되도록 당신이 먼 강이나 바다로 헤엄쳐 갈 시간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엄마의 치료비를 위해 그만둘 수 없었던 일에 인생의 가장 빛날지도 모르는 시간을 집중 투자했는데, 그 몰입의 자리가 최소한의 흔적과 습관만 남긴 채 쏙 두려빠지고 났더니 내 삶은 허허벌판인 거예요. 그래서 앞날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의욕도 없이 홀가분한 몸으로 당분간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요.

이때 타인들의 조소에 의해 기억의 밀도가 계량되고 추억의 모서리가 훼손되었다는 불쾌감에 사로잡힐 여유도 없었어요. 서둘러 글을 비공개로 돌려놓는 데에 신경 썼거든요. 감추기만 하면 어차피 이런 종류의 글은 유통기한이 있어서 금세 신선도가 떨어지는 법이니 얼마 안 가 다들 잊어버릴 거라 생각했어요.

그 무렵의 내게 남은 건, 그때 나를 살게 하고 내 몸을 세상에 붙들어놓은 바로 그 인어에 대한 고마움과 호기심뿐이었어요.

다만 그전까지의 견고한 일상과의 접촉면을 내 손으로 파괴한다는 감상에 취해서 나도 모르게 무모한 짓을 한 거나 아닌지 불안했지만, 낡고 허름한 삶에 밀착된 그 작은 식당과 뒤쪽 산자락을 타고 넘어오는 맑은 공기를 통해 나를 부른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서로가 알지 못하는 시간의 결여된 조각을 맞춰보는 장면은 아이러니 그 자체였어요. 그 글 속에 나타난 사람을 알고 그것이 상상 아닌 실존임을 이해하는 건 세상에 우리뿐이라는, 일종의 폐쇄적 공유의식이 생겨났어요. 하지만 막상 이야기가 이어지자, 과거에 대한 향수보다는 회한이 더 짙게 전해졌어요.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느낌이라고 명료하게 규정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뭐랄까요, 그건 완성시키지 못한 이미지를 제 손으로 부순 자의,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을 결국 덮어버리고 반납한 뒤 두 번 다시는 대출하지 못하게 돼버린 이의 표정에 가까웠어요. 겸손하고 온화하고 무엇보다 쓸쓸해 보였는데 그 후회의 색을 묘사할 방법은 내게 없네요. 윤색도 미화도 없는 성실한 서술, 그러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간 물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모순적인 요소와 반응들을 응시하며 나는 의도치 않게 참회를 듣게 된 고해소 신부나 된 느낌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당신의 모습을 한 조각씩 끼워나갔어요.

“겉으로 보기에 그런대로 평화로운 날들이었습니다. 그 녀석은 고통스러웠겠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라고 외면했어요. 나는 어차피 네가 될 수 없으니 너를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써만 너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또는 너를 없애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비뚤어진 믿음으로 일관했던 어린 시절이었지요.”

곤, 그에게 있어서 당신은 어쩌면 일찍이 들어본 적 없던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직조된 존재였어요. 그건 강하가 아니라 상대가 누구였어도 그랬을 거예요. 남과 같지 않은 것은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증오의 대상이 돼요. 아니면 잘해야 동정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타인이 시혜하는 동정과 그에 수반하는 불편한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수혜자의 합의 아래에서 보통 이루어지곤 해요. 당신에 대한 강하의…… 글쎄요, 그 불합리는 과연 뭐였을까요, 그 긴장과 불안과 원망은. 강하는 그 혼란을 평범한 일상이 주는 초조 정도의 차원으로 수용하려 했어요. 그 과정에서 당신에게 상처 입혔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론 아무것 아닌 게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라는 사실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괴리감을 견딜 수 없어 했어요.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낄 수 있었어요. 처음부터 놓아버리면 그만이었던 걸 자기가 붙들어 맨 셈이어서 거기까지는 도와주려고 했던 거예요.

원래 양가감정은 논리적으로 설명하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나만 해도 엄마 없이는 못 산다고 그렇게 오래 엄마를 포기 못 한다며 붙잡았으면서도, 엄마를 하루에 몇 번씩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갖다 버리는 상상을 한 적 있어요.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엄마가 떠났을 때 나한테 슬픔보다 먼저 큰 부피로 찾아온 건 해방감이었어요. 내 얘긴 됐고 곤, 보통 사람은 말이지요, 자신에게 결여된 부분을 남이 갖고 있으면 그걸 꼭 빼앗고 싶을 만큼 부럽거나 절실하지 않아도 공연히 질투를 느낄 수 있어요. 그러면서도 그게 자신에게 없다는 이유만으로 도리어 좋아하기도 하는 모순을 보여요. 양쪽의 세계에 걸쳐진 감정은 서로 교환되거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기껏해야 적정 수준에서의 은폐가 가능할 뿐이에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말을 건넨다고 그게 위로가 되겠나요, 웃으면서 건넨다고 농담이 되겠나요.

 

 

2024.10.23. WEDNESEDAY

두 사람 사이에 의례적인 침묵이 흘렀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누구나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지연 의식이었다. 낯섦을 분쇄하면서 그 낯섦이 연민 이외에 다른― 예컨대 혐오나 환멸 같은 것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짧은 시간 동안만 이어져야 할 행위였다. 

그들은 자신과는 달리 피를 나눈 가족이었으며 곤은 노인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때로 어색한 온기보다 그녀에게 퍼붓는 험악한 말쪽이 세월의 흐름이나 공백과 무관하게 밀착된 관계를 드러낸다는 걸 알았다. 곤은 노인이나 강하를 따라 가끔 바깥에서 만나 일정한 범위 내에서 관계를 맺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건 그저 ‘아는 사람’ 수준에 그쳤고 어떤 경우라도 오랫동안 친하게 지낼 수 없었으며 모든 관계가 잠정적이고 일시적이었다. 자연히 노인과 강하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모두가 되었지만 곤은 그걸로 불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가 누구인지를 이미 알아차리기는 했으나 다음의 수를 읽을 수 없는 적군의 동향을 탐색하듯 거리를 좁히지 않고 서 있었다. 선뜻 다가가 감동의 눈물과 포옹을 나눌 계제가 아님은 분명했고, 함께한 시간이 턱없이 적다는 데에서 나오는 단세포적인 민망함보다는 더 두꺼운 장벽이 있었다.

이미 입을 열 때부터 목소리가 떨렸으므로, 자신은 이 신경전에서 패배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곳은 이녕의 집이기도 했다. 자리를 오랫동안 비웠다 돌아와서도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부모란 그런 것이었다.

낮에 강하가 없는 동안 곤은 노인과 이녕이 다투는 소리를 통해 그동안 그녀의 행적과 내력을 짐작했다. 그건 통속적이고 진부한 구식 멜로영화 같은 것으로, (중략)

저 젊고 예쁜 아이들이 도열한 틈에 다시 끼고 싶었다.

곤은 나머지 사람들이 다 나가버리니 언제 그 영혼이 깨어 배회할지 모르는 무덤을 관리하는 묘지기가 된 심정으로 그녀 옆을 지키게 되었다. 무덤의 주인이 불현듯 일어나 확신을 잃고 비틀거리면, 그 발걸음을 조심스레 붙들어다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자꾸만 미망에 사로잡혀 불가능한 삶 쪽으로 떠도는 영혼을 관리하고, 그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떼를 입히고 풀을 매는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일이었다.

 

 

2024.10.24. THURSDAY

그러나 아무리 종일 집을 비운대도 두 사람은 그녀의 상태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걸까? 싱크대야 어차피 찌그러져 있었고 의자나 상 따위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낡았으며 티브이도 화면이 나오는 게 놀라운, 고물상에서 업어온 것이었으므로 날마다 조금씩 이 집에 일어난 타락과 파쇄를 감지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단지 그렇게 간주함으로써 보이는 것들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걸까. 공연히 만지작거리다 부수기보다는, 그런 형태로라도 보존하고 싶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눈을 감아도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수많은 별이 빛나. 별이라는 생각은 드는데 색깔은 파랑 빨강이 주를 이루니 현실에서라면 폭죽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건 부드럽게 빛났다가 어느새 희미하게 사라지는 보통 별들이 아니야. 톡, 톡! 튀는 소리를 내면서 부풀어 올랐다가 터지는 거야. 소리만 튀어 오르는 게 아니라 촉각이 선연해. 누군가 머리 여기, 관자놀이 바로 아래 있는 이 오목한 곳을 따악 딱 두드리듯이. 

그때 눈앞에는 바다가 나타나. 바다였나 강이었나 모르겠다. 하여간 저 앞에 있는 호수같이 고인 물이 아니라 빠르게 흐르고 출렁거려서 같은 자리에 두 번 다시 발목을 담글 수 없는, 그런 물이야. 주위 허공에는 보라색하고 오렌지색, 연두색이 젖은 종이에 들인 물처럼 퍼져나가는데, 얼마쯤 지나면 바람을 차곡차곡 접어 개켜놓은 듯한 아코디언 모양이 그려지지. 사진으로만 봤던 오로라를 실제로 본다면 그런 느낌일까. 그 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감각이, 오로라를 보면서도 느껴질까. 분명 눈에 보이는 이미지인데, 귀로 음악이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을, 오로라를 보면서도 하게 될까. 그와 함께 가슴 어딘가에 고여 있다가 확 번져나가는 따뜻한 물의 속절없음도, 알게 될까.

돌에 부딪쳐 부서진 물살이 머리꼭지부터 나를 덮쳐. 한 방울 한 방울이 얼음으로 만든 비늘처럼 내 몸을 찌르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아. 뒤로 계속 비켜서도 물이 가까이 다가와 찌르는 걸 이미 몇 번이고 경험했거든. 그래서 체념하고 그 물을 다 맞는데, 수많은 물방울들 하나하나를 타고 멸치같이 자디잔 물고기들이 튀어 올라서는 내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거야. 그것들이 내 살 속을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게 느껴져. 혈관을 타고 흘러가면서 꼬리지느러미를 살랑거리는데 그게 조금도 스멀거리거나 끔찍하지 않고 가볍게 간질이는 손가락 정도의 느낌이라 몸속에는 어느새 따뜻한 물이 고이지. 걔들이 내 몸속에서 말도 건다? 우리말이 아닌데도 나는 다 알아들어. 몸이 서로에게 흡수되면 아무런 통역을 거치지 않고도 뜻이 전달되는 거야. 깨어나면 뭐라고 했는지는 물론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나를 비웃거나 탓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건 분명해.

효과가 조금만 더 오래가면 그다음 책장을 열 수 있을 텐데, 놈이 나를 단 한 번만 구름 사이로 데려다준다면 나는 더 이상 이걸 안 먹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건 잘못된 일이며 그만둬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 그러면서도 이해와 공감을 구할 필요 없이 어떤 이야기든 담아 봉인할 수 있는 상자와도 같은 존재.

개켜놓은 옷을 한 벌 한 벌 들치면서 남아 있는 약 봉투의 개수를 세어보니 그 수야말로 자신의 수명을 표시하는 듯했고 그걸 셈하니 삶에 뜻밖에 끼어들지 모를 우연이나 돌발적 사태들을 감안하더라도 앞으로 길어야 한 달 남짓으로 보였다.

 

 

2024.10.25. FRIDAY

남은 사람은 그나마 곁에 있고 얘기 한마디라도 들어주는 곤뿐이었다. 동정도 경멸도 없이 무해한 시선을 건네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아이. 그녀는 누가 훔쳐 왔든 주워 왔든 결과적으로 이것이 자기에게 특별한 이유 없이 주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균형 잡히고 탄력 있는 아이의 등은 견갑골이 움직일 때마다 현란한 빛이 났다. 그 빛은 그녀가 지금 걸고 나온 목걸이에 박힌 보석인지 유리 조각인지 모를 펜던트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햇빛을 얻어 반사해야만 하는 구차한 물리적 존재들과 달리, 아이의 등에 돋아난 것은 그 자체가 빛의 절대량을 보유하고 있어서 그토록 청완하고 눈부신 것만 같았다. 그 등에서는 마지막으로 언제 가보았는지도 기억이 가물거리는 바다 냄새가 끼쳤다. 어쩌면 꿈속에서 목격한 바로 그 물터 같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명치 부근에서 부풀어 오르다 자신을 덮치는 감정의 파고에 편안히 몸을 내맡겼고, 꿈속의 한순간에 잠시 굽이쳐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뜨니 아이는 머리를 헹구는 중이었고 그녀가 목격한 광휘는 어디 사라지지 않고 거기 그대로 있었다.

“너 참…… 예쁘다.”

그러자 곤은 한 마리의 생선이 되어 도마 위에서 토막 나지 않도록, 자신의 살과 내장에서 간유를 짜내고 그 찌꺼기가 어박과 어분으로 분리되어 어느 짐승의 입에 들어가지 않도록, 어딜 가든 감추는 데 급급해온 자신의 몸이 누구도 들려준 적 없던 그 말 한마디로 구원받은 것만 같았다.

마음속 수면에 불쾌하고 탁한 거품이 일었다. 이내호는 가정집 어항이 아닌데, 성분 모를 물고기 따위가.

강하는 당장 다가가 오수에 빠진 두 사람에게서 이불을 찢어발길 기세로 벗겨버리고 싶었지만 앞으로 한 발 내밀기만 하면 힘이 빠져나가 그 자리에 엎어지리라는 걸 알았고, 버티어 서는 데만 온 힘을 짜내다 자신의 몸이 송두리째 방전될 것을 알았다. 곤이 눈을 비비며 상반실을 일으켜 앉자 그의 몸에서 나는 빛이 집 구석구석 흥건하게 퍼져나갔다.

불안이 곤의 마음에 침전물처럼 가라앉았으나, 그것을 제어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기에 그의 입장은 아직까지는 모호하고 감정은 막연했다.

피는 붉은 색, 보통 사람과 똑같고 대부분의 물고기와도 같은. 진화를 말하는 이들에 따르면 세상의 어지간한 동물은 바다 밑에서 올라와 서로 갈라졌다지.

그것에 이루 말할 길 없는, 어쩌면 분노에 가까운 서운함마저 느낀다고.

 

 

2024.10.26. SATURDAY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자극적이며 깨고나면 안타까운지,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상쇄할 수 있는 현실의 아름다움에 이 아이의 존재가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를

이제 입을 열면 돌이킬 수도 내버려둘 수도 없는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 감정에 질서와 가치를 부여하는 건 그녀를 돕고 싶다는 단순 명료한 마음이었다. 그전까지의 망설임이나 의혹, 경계 같은 것들은 ‘너, 예쁘다’는 그 말의 울림을 귓전에 떠올리자 조금씩 엷어졌다.

원망과 절망 사이, 경멸과 환멸 사이 어디쯤 자리한 감각을 강하는 곤에게 설명하려 들거나 그 자신이 이해를 시도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 여성이 선뜻 그러라며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기에, 곤은 발걸음을 멈춘 채 그 울림이 멀어지는 소리를 듣고 서서 하려던 말을 몸속에 붙들어버렸다. 그리고 정말로 곤은 그렇게 했다.

“게다가 나는 이미 늦었지. 보면 모르겠니?”

그녀는 자기 몸에서 단 하나 빛나던 금목걸이를 당겨 뜯어냈다.

“그러니까 이런 것도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아.”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가볍게 늘어뜨려진 금목걸이 파편이 째그르, 소리와 함께 바닥에 모래처럼 흩어지자 곧 색이 탁해졌다. 그전까지 머금고 있던 빛이 거짓말이거나 한때의 환영이었던 것처럼.

“그래도 잠깐이나마 빛나게 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예감했다. 그녀는 늘 결말을 놓친 꿈속에서 본 하늘을 나는 물고기와 비로소 일체가 되고 싶어 했으며, 그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은……. 이야기가 끝나면 책장을 덮는 것 외에 더 당연한 순서란 없었다. 

유의미한 말보다는 울음소리가 통화 내용의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아주머니가 돌아가셨어’라는 말만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의 색깔과 무게가 측정되지 않았다. 슬픔은 현실을 인정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일 뿐으로, 자신이 사태를 확인하기 전에는 얘기가 성립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돌아오는 발걸음마다, 다가오려는 슬픔이 앞코에 채어 밀려나갔다.

죽어서 이미 물질이 된 것과 살아 있는 것이 주는 두려움의 차이는 이렇게 극명했다. 

곤은 서둘러 설명하지 않으면 강하의 분노를 돋울 게 틀림없어서 무리하여 입을 열었으나 그리로 나오는 건 딸꾹질과 울음뿐, 사이사이 말의 형태로 된 것이 조금씩 끼어드는 정도였다. 제대로 된 서사가 빚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2024.10.27. SUNDAY

아무리 기억을 뒤져보아도 자신은 너무 일찍 외할아버지에게 맡겨졌고 어머니의 얼굴이나 한두 가지 에피소드 외에는 남은 게 없었는데도, 그 공허에까지 명복을 빌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강하는 잠깐 랜턴을 내려놓고 담배를 물었다.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정신 용량의 한계치를 넘긴 지 오래였지만 일단은 당장 손댈 수 있는 일부터 해야 했다.

강하는 곤의 후드를 벗기고 아가미가 달빛 아래 드러나도록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이게 있는 한 네 마지막 행선지는 감옥이 아니야. 잘 생각해봐.”

강하는 곤의 상상 이상으로 이 상황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른 모든 할 말과 비통함이나 고마움 그리고 미안함같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수습 불가능한 감정들을 젖혀두고 이렇게만 물었다.

“날 죽이고 싶지 않아?”

그것은 강하가 원하면 그렇게 되어도 할 말 없다거나 상관없다는, 가진 거라곤 남들과 다른 몸밖에 없는 곤이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였다. 그때 라이터에 간신히 불꽃이 일어났다.  

“물론 죽이고 싶지.” 

작은 불꽃이 그대로 사그라지는 바람에 곤은 그 말을 하는 강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곤한테 다시 후드를 씌운 뒤 조임줄을 당겨 머리에 단단히 밀착시키고 강하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언제나 강하가 자신을 물고기 아닌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지만 지금의 말은 그것을 넘어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

“다시는 오지 마.” 

곤의 발소리는 문간에서 그리 멀어지지 못하고, 몇 걸음만에 멎었다. 거기서 맴돌며 바닥에 남기는 주저흔의 깊이가 강하는 충분히 짐작되었다. 호수와 읍내를 제외하고 먼 길을 떠나본 적 없는 데서 비롯하는 두려움, 갑작스레 세상에 내던져져 마주 서야만 하게 된 당혹스러움 같은 것들. 이 세상은 온통 타인에 대한 의혹과 불신과 경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알려주며, 먼 길 나서지 못하도록 막아선 것은 강하였다. 그 망설임을 이해하면서도 강하는 문밖을 내다보지 않은 채로 나직하게 내뱉었다. “가라고.”

곧 타닥타닥, 작은 새가 날갯짓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곤이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강하는 이녕 앞에 다가가 마주앉았다. 그녀의 영혼을 위해서는 깊은 한숨을 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치라는 생각에 그녀의 얼굴을 향해 담배 연기만 한 모금 뱉어내고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중얼거렸다. “아, 나 진짜…… 도대체 왜 그랬어, 이 여자야…….” 

 

 

2024.10.28. MONDAY

당신 자체가 지금까지 사실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니까요.

호수를 옆에 끼고 살아온 사람들, 물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모든 물질의 응집력은 수분을 전제로 하잖아요.

그러니 당신은 그가 말하는 대로 믿어도 괜찮아요. 다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따로 있어요. 강하가 예전에 당신을 어떤 방식으로 싫어했든 간에, 그 싫음이 곧 증오를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걸. 그건 차라리 혼돈에 가까운 막연함이라는 걸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이 마음과 앞으로의 운명에 확신이라곤 없다는 사실뿐이지 않을까요. 강하와 할아버지만이, 그리고 막판에 이녕 씨만이 둘러싼 세상의 전부였던 당신에게, 이것은 선뜻 이해가 가는 말이 아닐 수도 있겠어요.

 

 

2024.10.29. TUESDAY

그러는 동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이제 와서 녀석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서 뭐 하나? 이미 녀석은 거기가 어디든 물가인 건 확실하고, 자기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갔으니까 말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사히 잘 살고 있는 모양이니 그걸로 됐다 싶으면서도, 나는 왜 아직까지 전화번호도 못 바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나는 숨기지 않겠어요, 곤. 딱히 내가 강하와 뭘 어쩌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남들같이 알찬 미래를 설계하기에는 각자의 정신이 이미 늙어버렸지만, 그 순간 느꼈던 보통 이상의 친밀함은 그저 타인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유일한 무엇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나눌 수 있는 한 조각의 감정, 한 마디의 호흡이었다고 하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늘에 금이 가는 소리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내내 그 방에 있었어요. 

강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우리는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지만 서로의 생각이 어디에 닿아 있으며 그다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예상할 수 있었어요. 내가 그를 잡아야 했을까요? 아니면 개연성 따위 얼마든지 상실하고도 그것이 서사적 약속이라 주장하는 삼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당신이 가면 나도 가겠다고 따라나서야 했을까요. 그는 내가 강에 빠진 경험 때문에 조금이라도 깊은 물을 무서워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 내가 함께 가자고 해도 거절했을 거예요.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2024.10.30. WEDNESDAY

어두침침한 밤의 흔적이 모니터의 불량 화소처럼 시야에 남아 있었지만 식당이 있었던 자리가 산사태에 덮이고 간판이 물에 둥둥 떠다니는 모습만은 볼 수 있었어요. 그 옆으로 몇몇 군인들이 얼기설기 얽은 간이 뗏목을 타고 생존자를 수색하는 광경은 한 폭의 초현실주의 회화 같아서 눈물도 비명도 나오지 않았어요.

이상한 일이지요, 그때마다 아니라는 걸 알고 안도하다니. 그때까지도 그들이 살아 있으리라는 한 조각 기대를 버리지 못하다니 말이에요. 대체 시신은 어디로 간 걸까요.

그래서 나는 그 현실을 아프게 직시하는 대신 동화를 선택하기로 했어요. 마치 내가 처음 어둠 속에서 곤, 당신을 만났을 때처럼 내 좋을 대로 생각해버리기로 했어요. 강하는 할아버지를 무사히 찾았을 테지만 넘어진 나무와 쏟아지는 산사태에 밀려 홍수에 떠내려갔을 거고, 그 생사는 이제 알 수 없지만 만약 세상을 떠났다고 치면 두 구의 시신은 물살을 타고 부드럽게 흐르다 어딘가 복잡한 구조물에 걸리는 대신 강가로 닿았을 거라고요. 거기서 또다시 너울거리는 물결을 만나 휩싸이면 그대로 흘러 넓은 바다로 나갔을 거라고 말이에요.

강하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나니까, 그의 이미지의 파편을 갖고 있는 건 나뿐이니까…… 나를 구해준 당신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든 전해주지 않으면 이 세상 어디를 가도 후회할 것 같았어요. 

나쁜 소식이지만, 당신을 만나 이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어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어요. 그래도 죄책감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에요. 내가 그날 밤 붙잡지 않았더라면, 찾아온 그를 곧바로 돌려보냈더라면 그는 어쩌면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이 소식을 전함과 동시에 용서를 빌러 온 거예요. 당신은 나를 구해줬는데, 나는 당신의 유일한 가족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말았어요. 이제 당신이 남의 전화를 빌려다가 사진을 찍어 전송할 곳은 그 아무 데도 없어요. 

그렇게 슬프게 웃지 마요. 그 얼굴을 보니 당신 대답은 잘 알겠으니까. 아니에요, 나한테 미안할 거 없어요. 고작 한 번 만난 데다 당신들의 세월에 대해 무얼 안다고, 내가 주제넘었던 거죠. 아이 참, 고맙다는 인사도 필요 없다니까요. 강하의 마지막을 함께한 게 나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치사는 과분해요. 내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고 무엇보다 나를 그와 만나게 한 건 당신이니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나 정말 이 말만은 꼭 들려주고 싶었어요. 비가 가늘어질 때까지 조금만 더 있다 가라고 그 사람 붙잡은 바람에 들을 수 있었던 마지막 이야기예요. 

곤, 당신 이름 있잖아요. 그거 할아버지 아니고 강하가 지어준 거래요. 그렇게 부르기도 기억하기도 쉬운 단 한 글자뿐인 이름을, 막상 자기가 붙여놓고 부르지도 못했대요. 장자의 첫 장에는 이런 얘기가 있거든요. 북쪽 바다에 사는 커다란 물고기, 그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강하는 당신의 아가미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으로서 이거야말로 이 아이한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대요. 하지만 그래놓고는 당신의 이름을 부른 적이 거의 없었죠. 그건 그다음 장에 있던 한 줄이 일종의 예언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이 물고기는 남쪽 바다로 가기 위해 변신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고 한다. 그의 등은 태산과도 같이 넓고 날개는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과 같으며 한 번 박차고 날아오르면 구만 리를 날아간다고요. 

언제 어떤 일로 떠날지 모르는 아이였잖아요. 오랜 기간 이내촌에 머물긴 했지만 실제로 당신은 불의의 사고로 떠나왔고요. 강하는 그 이름을 일상적으로 부르는 것조차 두려웠던 거예요. 한 번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존재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한 음절이 혈관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마침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2024.10.31. THURSDAY

그 아저씨는 원래 자기는 바다가 좋아서 물에 아주 들어가 사는 사람이니까 괜찮다고 그러잖아. 그래서 왜 바다에 사느냐고 물어봤거든. 아주 중요한 사람을 찾고 있대. 그런데 왜 밖에서 안 찾고 물에서 찾느냐고 물었더니, 사실은 중요한 사람의 시체를 찾고 있다는 거야.

엄마, 내가 인어를 봤다니까? 그 아저씨는 분명 바다 깊이 궁전에 사는 인어 왕자님일 거야. 그런데 마녀가 준 약을 먹고 두 다리가 생긴 거지. 인어 왕자님은 누구를 위해 다리를 얻은 걸까? 그러면 역시 언젠가는 물거품이 되어서 아침 햇살에 부서져버릴까?